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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2)

by 김창집1 2024. 6. 5.

 

 

숨빌락*

 

 

  팔월엔 불어터진 생각이 둥둥 뜬다

 

  헛디딘 순간마다 납작하게 붙어있는 군부를 떼어내다, 소금기 많은 과거가 하얗게 내 몸에 피어난다 뜨거운 태양의 역광으로 외로움도 씻겨내고 파도에 묵은 때를 벗기던 아홉 살의 여름, 그 여름을 품고 있던 아이들은 바다를 절부암에 가둬놓고 두 눈을 감은 채 연신 자맥질로 같은 숨만 호흡하며 누가 오래 버티나 내기하다, 불어터진 하루를 품고 귀가하던 그때처럼

 

  바다에 가닿은 영혼, 도대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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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빌락 : ‘아이들이 바다에서 자맥질하며 누가 오래 참는가를 견주는 놀이의 제주어

** 도대불 : 제주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 등대

 

 


 

섬메섬메*

 

 

중심을 잡으라고 섬메섬메 어르네

 

세상도 내 마음도 게걸음 비틀비틀

 

그대로 꼬꾸라져서 일어나지 못하면

 

어머니 어르는 노래, 나도 따라 어르네

 

넘어지면 섬메섬메 잘 서라고 섬메섬메

 

온종일 살길 헤매어도 허기지던 그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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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메섬메 : ‘어린애에게 손발을 놀리거나 서도록 하면서 어르는 소리의 제주어

 

 


 

왈락*

 

 

  습도에 질척이고 가쁜 숨 차오르면

 

  살아온 생애가 늘 그렇듯 애써 태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갈 때가 언제인지 모를 뿐, 우리는 5개월 길면 일년을 버틸 것이라 생각했다 병원 안은 건조했다 마른 수건 빨아서 옷걸이에 걸 때마다 내 심한 비염은 콧물로 훌쩍거렸다 어쩌다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리려 하면 어머니는 아이고 무사 영 날이 왈락 더우니?**”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어가서는 창문을 열어놓곤 했다 그래 아직은 초겨울이잖아 첫눈도 안 왔는데 어머니가 눈치 채지 못했으니 모두들 목구멍에다 잔뜩 울음을 올려놓고도 내뱉지는 않았다 아니다 어쩌면 자식들을 위해 애써 태연한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날도 어머니는 왈락 덥다며 창문을 열어놓는데, 그만 그 틈새로

 

  싸락눈, 눈물 반 섞여 왈락허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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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왈락 : ‘열이 갑자기 솟는 꼴의 제주어

** “아이고. 무사 영 날이 왈락 더우니?” : “왜 이리 날이 덥니?”라는 뜻

*** 왈락허다 : ‘격한 감정이 솟구치거나 어떠한 생각이나 느낌이 한꺼번에 밀려 넘쳐 차오르다의 제주어

 

 


 

아래아

 

 

손놀리곡 몸놀령 오몽해사 살아진다

어르고 달래면서 곧은 길만 가게 하던

이제 와 귀 기울이니 정겨웠던 말이네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의 그 어머니

목숨 긴 삶의 문장 풍상을 건너면서

내뱉지 못한 말들이 동백으로 물드네

 

이 말이 저 말 같고 저 말이 이 말 같아

난해한 아래아를 표음문자 해석하듯

외래어 난무한 제상에, 살아있어 고맙네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동학시인선 122,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