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으아리 망울은 아직 먼 길에 있었다 - 여연
빨간 벽돌 이층집은
호린 오후를 지붕에 널어놓고
안주인은 적요에 칩거 중
하안 꽃 피우는 으아리
보라 꽃 피우는 으아리
두 종을 데크 아래 심으며
언니 곧 꽃 필 거야 꽃 피면 보러 와
4월이었다 한도 설움도 많은 계절
진도 앞바다에 매달린 리본의 물결도
주기를 앞두고 눈물을 준비하던
한 번도 본 적 없는 반듯한 미간은
하야니 더 비수다
사람 사이 싹둑 가위질하던 솜씨로
안녕을 잘랐다 끈 끊어졌다
너와 나의 인연 줄은 여기까지라고
가는 게 세월만이 아니라며
돌아선 걸음걸음 불어오는 건
봄바람 아니다
겨울바람이다
남은 자 머리 위로 흩날리는 건
벚꽃 아니다
얼음꽃이다
으아리는 아직 엄지만 한 망울도 내밀지 못했고
흰 꽃 자주 꽃은 더욱 먼 길에 있지만
유월이면 온통 으아리 아리겠다
♧ 나비
잠견*의 벽을 깬
선새벽은 신선하다
인력 시장 앞
집시 기질의 사람들
업종을 가리지 않는다
차가운 야생, 적멸의 시간
주머니는 채워지지 않았고
봄은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날품에 길들여진 사람들
품삯을 흥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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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에가 실을 토하여 제 몸을 싸서 만든 집.
♧ 내가 없어도 - 윤태근
광활하고 오묘한 자연 속에
점 하나만도 못한 존재라고요?
내가 없어도 태양은 빛나고
꽃과 별들은 웃는다고요?
시장 안의 활기는 여전하고
출퇴근 전철도 붐빌 거라고요?
그런데 그런데~
태양 꽃 별 시장 전철 모두
내가 없다면 있는 걸까요?
♧ 장미에게 – 이상호
말하자면 붉고 노란 아름다운 것들이
가끔은 가랑비 설킨 설움이어도 좋으리
말들이 자글거리는 입안이라면 더욱 좋으리
문창살에 새겨져서 창밖으로 흔들리는
이 밤만은 단둘이가 아니라도 좋으리
질기게 기대어 서서 눈물 나게 울어도 좋으리
선잠 깬 새벽 거리에 가시 하나 품고 서서
상처 하나 길게 내놓고 미움 끝 뒤에라도
기억이 사라지지 않게 가지 하나 내밀어 다오
* 월간 『우리詩』 6월호(통권 제432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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