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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9)

by 김창집1 2024. 6. 15.

 

 

송냉이골 억새

 

 

몸빛이 흐려질수록

기억도 가물거린다

 

파도치던 푸른 힘줄도

바람을 탄 핏빛 함성도

 

무명빛 봉분들 앞에 다비를 준비할 때

 

억새라 불러도 좋다

이욱이라 불러도 좋다

 

넉시오름 능선 따라

한 점 불티로 스러져도 좋다

 

산사람 붉은 묘비명 고쳐 쓸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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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110,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서 벌어진 토벌대와

무장대 간 교전으로 사망한 무장대의 합동묘역이 있는 43유적지.

 

 


 

아끈다랑쉬

 

 

세화에서 송당 사이

다랑쉬 아래 아끈다랑쉬

 

일자무식 까막눈이 난쟁이 홍 씨* 같네

글보다 산과 들의 말 더 많이 알았던 이

 

소와 말 흩고 부르던 휘파람 소리 위에

어이어이 어 아 흐응- 노랫가락 더하면

강직된 근육을 풀고 노루도 따라왔네

 

팔다리가 길지 못해

목숨 줄도 짧았던가

 

폭낭 곁 연못가의 붉은 종이 주워 들다

코와 입 선지피 쏟고 비명에 갈 줄이야

 

향기로운 풀과 넝쿨 오름을 다 휘덮어도

마소와 말을 섞던 테우리는 오지 않고

 

난쟁이 휘파람 같은 바람 소리만 낭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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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화리 부호의 집에 고용되어 테우리(목동)로 일하던 중 다랑쉬

마을에서 담배를 말기 위해 주운 전단지를 갖고 있다 토벌대에게

산폭도로 오인되어 죽임을 당한 홍우경 씨.

 

 


 

이덕구산전*을 찾아서

 

 

산밭을 찾아가다

두 번 세 번 길을 잃었다

 

여긴가, 저기인가 골골샅샅 둘러봐도

위장막 드리운 숲은 속을 열지 않는다

 

키를 낮춘 조릿대가 아직도 보초를 선

잡목 숲에 웅크린 늙은 노루 한 마리

옛 터의 주인 행방을 그는 알고 있을까

 

들 수도 날 수도 없는 금단의 구역에서

눈이 녹길 기다리며 기수에 숯을 피우다

쓰러진 움막 속에서 연기가 된 사람들

 

침묵에 빠진 산은 아무려나 말이 없고

지난봄 고사리마에 글썽해진 작은 개울

 

발밑의 삭정이들만

딱총 소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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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 조천면 교래리 소재. 제주 43 당시 인근 마을 주민들이

숨어 지내던 곳. 유격대 대장이었던 이덕구가 부대를 이끌고 주둔

하다 최후를 맞기도 했다. ‘북받친밭이라고도 한다.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