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냉이골 억새
몸빛이 흐려질수록
기억도 가물거린다
파도치던 푸른 힘줄도
바람을 탄 핏빛 함성도
무명빛 봉분들 앞에 다비를 준비할 때
억새라 불러도 좋다
이욱이라 불러도 좋다
넉시오름 능선 따라
한 점 불티로 스러져도 좋다
산사람 붉은 묘비명 고쳐 쓸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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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월 10일,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서 벌어진 토벌대와
무장대 간 교전으로 사망한 무장대의 합동묘역이 있는 4․3유적지.
♧ 아끈다랑쉬
세화에서 송당 사이
다랑쉬 아래 아끈다랑쉬
일자무식 까막눈이 난쟁이 홍 씨* 같네
글보다 산과 들의 말 더 많이 알았던 이
소와 말 흩고 부르던 휘파람 소리 위에
어이어이 어 아 흐응- 노랫가락 더하면
강직된 근육을 풀고 노루도 따라왔네
팔다리가 길지 못해
목숨 줄도 짧았던가
폭낭 곁 연못가의 붉은 종이 주워 들다
코와 입 선지피 쏟고 비명에 갈 줄이야
향기로운 풀과 넝쿨 오름을 다 휘덮어도
마소와 말言을 섞던 테우리는 오지 않고
난쟁이 휘파람 같은 바람 소리만 낭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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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화리 부호의 집에 고용되어 테우리(목동)로 일하던 중 다랑쉬
마을에서 담배를 말기 위해 주운 전단지를 갖고 있다 토벌대에게
‘산폭도’로 오인되어 죽임을 당한 홍우경 씨.
♧ 이덕구산전*을 찾아서
산밭을 찾아가다
두 번 세 번 길을 잃었다
여긴가, 저기인가 골골샅샅 둘러봐도
위장막 드리운 숲은 속을 열지 않는다
키를 낮춘 조릿대가 아직도 보초를 선
잡목 숲에 웅크린 늙은 노루 한 마리
옛 터의 주인 행방을 그는 알고 있을까
들 수도 날 수도 없는 금단의 구역에서
눈이 녹길 기다리며 기수에 숯을 피우다
쓰러진 움막 속에서 연기가 된 사람들
침묵에 빠진 산은 아무려나 말이 없고
지난봄 고사리마에 글썽해진 작은 개울
발밑의 삭정이들만
딱총 소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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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 조천면 교래리 소재. 제주 4․ 3 당시 인근 마을 주민들이
숨어 지내던 곳. 유격대 대장이었던 이덕구가 부대를 이끌고 주둔
하다 최후를 맞기도 했다. ‘북받친밭’이라고도 한다.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 (고요아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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