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중산간 길을 걷다가 안개에 갇혔다
숨 가쁘게 걸어왔던 길들도 모두 지워지고
덩그러니 중심을 잃고 미로에 선 나
어디로 가야 하나? 뒤를 돌아봤지만
아직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며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 봄, 엿보다
바람처럼 왔다가 사나흘 살더라도
피우리라. 피우리라 물관으로 실어나른
저 것 봐 바람꽃 한 송이
얼린 손 내미는 거
어제 놓아버린
핏줄 마른 다짐들이
또다시 꽃 앞에서 속수무책 무너지고
게으른 발자국 털며 출렁이며 오는 봄
♧ 연두의 시간
또르르 말린 햇살 연두의 시간이네
초롱초롱 눈뜬 도시 새싹들의 시간이네
덧칠에 덧칠한 길들
어제가 달려오네
구름과 바람 사이 산과 들을 건너온
포개고 또 포개져 오는 넌 누구니
사월의 가로수길에 손 흔들며 서 있는
그 이름 푸른 청춘 그렇게 봄을 껴안고
이끼 낀 초원 위를 밤새도록 달리다
고목에 싹을 틔울라
일렁이던 시간아
♧ 산정호수의 아침
누구의 안부일까,
일렁이던 파문은
소금쟁이 수묵화 치던 물장오리 산정호수
언제나 마르지 않은 푸른 눈빛 간직한
서둘러 떠나간 자리
여백으로 남긴 채
분화구에 몰려든 어진 안개 달래던
설문대 둥근 밥상에 고봉밥 한 그릇
오늘도 모락모락
한 끼니 위로를 얹고
벼랑 끝 외줄 타던 산딸나무 사이로
어느새 수천 마리 나비 우화를 꿈꾼다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 (한그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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