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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의 시(9)

by 김창집1 2024. 6. 21.

 

 

사랑의 노예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를 보고

 

 

달콤한 아리아의 선율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암사자 같은 데릴라의 관능적 애무로

삼손의 마음을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버렸다

원시의 동굴 속으로 유인하듯

이방 여인의 치마폭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삼손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힘의 비밀을

데릴라의 사랑과 바꿔버렸다

하늘에서 천둥소리 들린다

하나님의 능력이 떠난 삼소은

허수아비 되어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두 눈마저 빼앗겼다

사랑의 노예가 되어

그들의 조롱 속에 연자방아를 돌리는

비참한 삼손의 모습

억장이 무너진다

 

 


 

봄의 제전

   -발레 봄의 제전을 보고

 

 

봄의 맥박이 요동친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숨 가쁘게 달려온

기적 소리 들린다

얻음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복수초같이

긴긴 밤 대지의 자궁에서

꿈꾸던 씨앗들

생명이 꿈틀거리며 천지를 뒤흔든다

 

부족들 사이로

유년의 기억 모락모락 피어난다

달 밝은 밤

올래동산에 모여든 아이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떼창을 부르며 놀던 풍경이

리듬 타 출렁거린다

 

강렬한 춤사위는 무르익어 가고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듯

천둥소리 들린다

김녕사굴 전설이 떠오른다

혼란과 두려움 속에

선택된 여제

태양신께 바친다

 

 


 

영원한 사랑

    -오페라 안드레아 세니에를 보고

 

 

누구나 한 번쯤 사랑의 그늘에서

뒤척이던 밤이 있었으리라

모닥불처럼 활활 타오르기도 하고

하루아침에 사그라지기도 하는

변덕스러운 바람 앞에 인생을 걸기도 하고

가슴에 품기도 하며 괴로워해 보았으리라

제라르는 한때 순수한 마음으로 혁명에 가담했지만

권력을 소유하게 되자 욕망이 불타올랐다

마달레나는 사랑하는 안드레아 세니에를 살리기 위해

제라르의 욕망 앞에 자기의 육체와 맞바꾸려 한다

(나는 이미 죽은 몸이에요. 내 육체를 가지세요.)

세니에를 향한 진정한 사랑이 제라르를 굴복시켰다

순결한 사랑 앞에 제라르는 고개를 못 든다

죄 없는 친구 세니에를 기소한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사형을 당하는 연인과 함께

마달레나는 단두대를 선 택하였다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의 시간이지만

(5월의 아름다운 어느 날처럼)

그들은 행복하였다

새벽을 기다리며 연인과 함께할 수 있음에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나의 두 눈 안에 너의 하늘이 있다)

벅찬 사랑의 감동이 번진다

 

 


 

슬픈 오해

    - 오페라 오셀로를 보고

 

 

사악한 이아고는 언제나 뱀같이

다가온다

의심은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등나무같이 칭칭

사람들의 마음을 동여맨다

질투의 불씨는 마른 장작 위에서

활활 타오른다

용맹스럽고 믿음직했던 장군의 모습은

초라한 의처증 환자 되어가고

상상의 날개는 의심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애처로운 데스데모아

죽음의 그림자는 서서히 다가오는데

나는 당신만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의 진실을 알릴 길이 없구나

시시각각 다가오는 운명의 잔을 마셔야 하는

쓸쓸한 이 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애절한 버들의 노래

가슴을 파고든다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한그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