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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6월호의 시(4)

by 김창집1 2024. 6. 22.

 

 

 

사월

 

 

겹벚꽃 사월이 붉다

연인의 보조개 웃음이 꽃나무 아래서

눈부시게 머물고

 

침잠한 꽃 아래

조용한 영원의 생명이 꿈틀거리는 뿌리

다채롭고 신비한

시간이 날개를 펼치고

꽃봉오리마다 부드러운 숨결을 내쉰다

 

멀리 떨어져 나가더라도

아기처럼 순수한 마음이 펼쳐지고

가지 끝마다 피워 낸 꽃봉오리

경이로운 시간은 멈추지 않아

사라지지 않아

 

나른한 햇살에

꽃잎이 시들고 우리의 시간이 흐릿해지면

나무도 조금씩 나이를 잊어 가리

 

시간이 쇠잔하여 사라지더라도

너의 미소는 사월이면

벚꽃잎으로 붉게 피어나리

 

무수한 겹벚꽃 무리

무수히 반짝이는 웃음들

 

꽃 아래 노인이 소년처럼 붉다

아이가 춤추며 꽃 사이로 뛰어가고

여자가 붉은 숲길을 사뿐히

날개 치며 걸어간다

 

 


 

투명인 김나비

 

 

나는 매일 투명해지고 있다

도깨비감투를 쓴 것도 아닌데,

 

편의점으로 여자가 들어온다

얇은 표정으로 딱따구리 소리를 내며 껌 씹는 여자

핸드폰은 왼쪽 귀에 붙이고 큰 소리로 통화하며

오른쪽 검지로 팔리아멘트를 가리킨다

담배를 계산대 앞에 꺼내 주고 얼른 눈을 깐다

 

허공을 밀어내며 부풀던 풍선이 푹 널브러지고

다시 퍼진 껌을 일으키는 여자

뒤돌아서는 그녀의 눈빛이 내게 말을 한다

 

!

 

어제 온 손님의 눈빛이다

눈빛마저 표절하다니

 

여자가 문을 밀고 나가자

문 위에 늘어진 면발처럼 걸려 있던 종이

삿갓 쓴 머리를 흔들며 깔깔거리고

표독스러운 바람은 유리창을 할퀸다

 

빗방울만이 나를 알아보는 듯

유리에 다닥다닥 엉겨

투명한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는 점점 더 투명해진다

 

투명하다는 것은 깨지기 쉽다는 것

뽁뽁이 같은 보호막이 필요하다는 것

 

빨갛게 살고 싶다

명치에 오래 가둬 두었던 말을 꺼내 발음해 본다

바짝 마른 말이

울대를 타고 삐걱삐걱 걸어 나온다

 

편의점 문이 열리고, 종이 깔깔거리고

손님이 내게 도깨비감투를 또 씌워 준다

 

 

 

 

길들이기 - 김세형

 

 

그대여!

눈길 손길 발길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그대여!

길은 내보내는 것이 아니다.

들이는 것이다.

그대 안으로 들이는 것이다

그대가 그대 몸 밖으로 내보낸 그대의 길들이

지금 낯설고 물선 타향 객지 길 위에서

탕자처럼 길을 잃고 헤매고 있나니

그대여! 길 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그대여!

이제 그대의 눈길 손길 발길들을 그대 몸 안으로 불러들여라

길들의 고향, 그대 마음길로 불러들여라.

마음밖엔 길이 없나니,

그대 마음 길은 길 없는 길,

천로역정 영원의 고향길이나니.

 

 


 

초록 - 김은옥

 

 

육덕 좋은 저 햇살

나무마다 꽃마다 마구마구 몸 치대더니

봄날을 초록으로 가득 채워 놓았군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어느 밤 별똥별 하나가 나를 관통해 왔지 예고도 없이

내 몸에 깊은 구멍을 만들어 놓더군

불의 제단에 던져진 느낌이었지

 

마지막이듯 거대한 초록을 망막에 비춰 보는데

별똥별 앞 다투어 꽃피우는데

초록도 구멍 같이 타오르는 어둠이더군

 

 

                              *월간 우리6월호(통권 제43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