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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6월호의 시(3)

by 김창집1 2024. 6. 18.

 

 

징검돌다리 - 정순영

 

 

겨울바람에 쌩쌩 소릴 내며

괴롭게 흔들리던 늙은 나뭇가지에

맑고 환한 꽃이 피는

봄날

얼음이 녹아 흐르는 요단강 징검돌다리를

육신의 욕망으로 건너다간

헛것을 짚어

꺼지지 않는 불속에 빠진다는 걸

비렁뱅이를 만나 참 빛을 듣고

십자가의 사랑이 흘리는 피에 젖어

믿고 새 생명을 얻으니

영육이 해맑아 가뿐하게 천국으로 건너가네

 

 


 

사계절의 노래 - 조성례

 

 

창문을 훌쩍 넘어온 건달 바람에

온몸을 흔들며 춤을 추던 벽걸이 달력

흥에 겨워 펄떡

전기밥솥 위로 뛰어내린다

 

동시에 삼백예순다섯 날이

때구르르 함께 뛰어내린다

무대 위 가수들처럼

가지각색의 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봄날 꽃잎 벌어지는 소리

장마철 소나기 속에 난타가 울려 댄다 등등

무더운 여름 마당가 간이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의 야호 소리

푸른 잎이 지쳐서 단풍으로 늙어 가며

낙엽 밟는 소리에

너는 아느냐고 구르몽의 가을을 노래하는 소리

,

가끔은 허리 아픈 아내의 신음소리도 들린다

 

숫자들이 막고 있는 밥솥 구멍에선

저 멀리 기차역에서

출발을 알리는 기저 소리가 들린다

늦은 밤 고요 속에

치지직 레일 위를 긁으며

 

토광에 걸렀던 씨망태기

이랴아아 ! 노동요조차 나른한 오후

 

 


 

낙화落花 - 허기원

 

 

진달래꽃 살구꽃 순이가 따 주던 꽃

두견화 꽃잎 속에 웃던 희아 어디 갔니

그 옛날 풋사랑 시절 가고파라 보고파

 

얼마나

찬란해야

저리 반짝 빛나는가

 

살랑이는

바람결 속이

어디 내 뜻뿐이라

 

세상에

몸 얹었으니

원래(自然)대로 가는 것

 

꽃잎이 미려해아 하늘 문이 열리는가

떨어지는 모든 것들이 어디 꽃잎뿐이랴

이승에 보시하는 일생이라고 일컫네

 

 


 

때죽나무 백수인

 

 

  골짜기 흐르는 냇물 가를 따라 숲으로 오르고 있었어요 호랑이가 내려와 놀고 갔다는 너럭바위를 지나 옛 선비들이 돌을 베고 낮잠을 잤다는 바위에 다다르자 어디선가 소리들이 스멀스멀 몸속으로 기어들어 오는 것을 느꼈어요 골짜기 물이 돌 틈을 돌아 흐르는 소리인가 나뭇가지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들의 발자국 소리인가 숨을 멈추고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종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하얀 종소리였어요 상큼한 향기가 배어 있는 하안 종들이 작은 몸을 뒤척이며 내는 가늘고 카랑한 소리였어요

  그 종소리들이 물에 녹아 흐르면 먼 강에서 수많은 물고기들이 잠깐 기절하듯 잠 속에 빠진다네요. 그때 물고기들이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네요 내 몸속으로 스멀스멀 들어오는 종소리들이 나를 넓적한 바위 위에 앉히고 가부좌를 틀게 하네요 두 눈을 지긋이 감고 깊은숨을 쉬네요

 

 

      *월간 우리6월호(통권 43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