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의 시(10)

by 김창집1 2024. 6. 29.

 

 

하논 마르

    -제주문화역사 나들이

 

 

병풍을 두른 듯

바람도 비껴가는 포근한 옛길

논둑길 따라 논물이 재잘대는 아늑한 곳에

까까머리 이병 같은

벼 빈자리마다 파르스름하게 싹이 돋아

상큼하다

 

추수가 끝난 하논 마르에서는

새소리와

물소리에

흘러가는 구름 한 토막 뚝 잘라놓고

가을을 끓이고 있다

 

큼지막한 하논 대접에

가을 한 국자 퍼 담아서

베지근한 가을을 건네고 있다

 

 

 

 

적송 위의 나부상

    -제주작가 문학기행

 

 

전등사 성문에 들어서면

적송 몇 그루 성문 옆에서

풍경으로 스며드는 토성을 지키고 있다

멀찍이 나무 그늘에 앉아

적송을 바라보노라면

가지 끝에 여인이 보인다

도편수와 사랑에 빠졌던 주모가

돈에 눈이 멀어 도망갔다더니

언제 돌아왔는지

적송 위에 걸터앉아

솔잎 사이로 보이는 바깥세상을 탐하고 있었다

 

 


 

소금 빌레

   -제주문화역사 나들이

 

 

절벽을 깎아 세운 듯한 다각형의 기둥 위에

멍석을 깔아놓은 너럭바위

너부작작 바닷물을 널어놓고

천형인듯

하늘만을 바라보는 삶이었다

 

마르고 마르고 마르도록

살이 에이는

가난을 퍼 나르며

고단한 생활을 바닷물에 담그고 절이며

얼마나 뒤척였을까

고통의 사리 같은

하늘의 내려준 귀하디귀한

하얀 보석

 

아름다운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천혜의 구엄리 소금 빌레

오늘도

태양 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의 사랑 같은

하얀 눈물

 

 


 

눈 섬

    -제주문화역사 나들이

 

 

누구의 작품인가?

차귀도 옆에 누워 있는 사람

물의 대지 위에 엎디어

해초들의 노래를 듣는

그대는

 

입동을 앞둔

마지막 가을 잎새 같은

입김이 스칠 때

갯가의 억새도 꺾이고 휘어지며

누울 자리를 펴고

말 없는 한치도 선창가에서

훌훌 옷을 벗어버리고

곡예사의 그늘 같은 하루를 말리고 있다

 

눈 섬을 바라보는

행인도

그대 따라 눕고 싶다

먼먼 태고의 자장가 속으로

숨어들 듯

자연의 품속으로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한그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