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후
너를 보낸 시간 앞에 늘 목이 마르다
허기진 기억들이 봄이면 꿈틀꿈틀
하늘로 올려본 날이
몇 날 며칠이던가
그리움의 끝자리엔 회색빛만 감돌다
혹독한 겨울 지나 붓끝을 세우다 말고
산목련 꽃 문을 열며 그렇게 너는 왔다
사나흘 마주 보다, 막막하고 막막한 채
아무 말 못하고 선 네 몸짓을 보았다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뭉클하고 뭉클해진
♧ 산 목련
겨울의 꽃눈을 달고 그녀는 내게로 왔다
오랜 불임의 시간 탯줄을 자르고
이제 막 배냇저고리 가지 끝에 걸렸다
♧ 그 여름
있는 듯 없는 듯이 없이 살자 그랬지
세상 밖 소리조차 자물쇠를 채워놓고
뜨겁게 달궈진 방 내가 나를 가둔다
그렇게 사흘 나흘, 그 여름 다가도록
꽃 대궁만 올리다 상사화 꽃 진 자리
연북로 귀퉁이 돌아 내가 거기 있었다
♧ 가을을 전송하다
얼마만큼 더 가야 그곳에 가 닿을까
지다 만 쑥부쟁이 그늘 반쯤 기대어
십일월 하늬바람에 길을 트는 따라비오름
견딜 만큼 견디리라, 뜨겁던 다짐마저
억새꽃 들판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려
마침내 백기를 들고 그 앞에 내가 섰다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 (한그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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