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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11)

by 김창집1 2024. 7. 1.

 

 

다섯 그루 팽나무

 

 

한날한시 온 마을이

제지내는 일월 북촌

비손하듯 씻김하듯 당팟당을 찾아간다

팽나무 다섯 그루가 신당 차린 작은 언덕

 

총소리 비명소리 나이테에 새긴 나무

화산도 불의 시간 피돌기로 재워가며

검은 돌 흉터 자국도 초록으로 감싸왔다

 

납작 엎던 서우봉에 붉덩물이 번질 때면

옹이마다 되살아나는 그 겨울의 환상통

숨죽인 흐느낌 같은 물소리도 들린다

 

봄 되면 일어서라

일어나서 증언하라

 

바다를 건넌 바람 귀엣말로 속삭일 때

규화석 껍질을 벗고 우듬지를 세운다

 

 


 

엉또폭포

 

 

핏빛 동백 뚝뚝 지면

가슴은 늘 타들었다

 

눈물이 없어

눈물이 없어

더 쏟아낼 눈물이 없어

 

겉마른 사월 계곡에

몰래 뱉는 속울음

 

물허벅에 물이 비면

집도 절도 망한다고

 

그예 젖은 눈빛들이

남녘 하늘 우러를 때

 

일찍 온 고사리마가

화산섬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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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왼바라기에 수록된 동명의 작품을 개작하였음.

 

 


 

가을, 항파두리

 

 

불화살을 쏘아댄다

참빗살나무 붉은 잎이

 

가으내 여문 햇살 채질하는 오름 기슭

바람도 올레를 따라 들메끈을 조이고

 

몇 가닥 거미줄에도 발이 채는 서툰 산행

잊힌 야사 캐내려다 목이 쉰 까마귀가

토성 안 순하게 엎던 봉분 하나 굽어본다

 

음복술에 취했을까

불콰해진 길섶마다

 

알알이 뭉쳐 영근 천남성 붉은 열매

삼별초 독기가 서린 몸피를 부풀린다

 

해 저문 단풍 숲에 환영처럼 이는 불길

까치놀 먼 바다로 향불 연기 타래칠 때

잘 벼린 언월도 같은 초승달이 내걸린다

 

 


 

알뜨르 개망초

 

 

한 시대 봉분 같은 격납고 지붕에서

고향으로 가지 못해 귀화한 꽃을 본다

개망초 하안 꽃잎이 여름에도 몸을 떤다

 

통곡의 바람소리 지하 벙커 울릴 때면

무심히 찍고 기는 저 무채색 발길 향해

뒤늦은 참회의 촛불 목숨처럼 받들고

 

걸낫과 괭이 앞에 숨을 곳이 있었던가

예비검속 들불에도 꽃대 세운 헛된 나날

내리막 팔월 땡볕이 노을 속에 저문다

 

활주로 걷은 들녘 초록 물결 파도치고

섯알오름 까마귀도 검은 상복 벗고픈지

이끼 낀 밭담에 앉아 노인성을 쫓고 있다

 

 

  *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