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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11)

by 김창집1 2024. 7. 2.

 

 

사랑을 장독대에 담고

 

 

오후의 햇살 속에서 다듬다듬 다듬거리는

다듬이 소리 들릴 때

그 다듬이 소리가 슬픈 눈꺼풀을 들어 올릴 때

오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요고

아낙네가 흘린 씨앗에서도 꽃이 피어났다

 

사랑을 담아두는 건 쉬운 일이지만

장독대의 푹 익은 고추장이나 된장처럼

매콤하거나 구수하게

익히기는 어려워

 

가끔 가슴 졸이며 내 마음의 장독대를 열고

새끼손가락 푹 찍어 맛을 보지만

비 온 뒤 내 사랑은 쓰다

햇살이 뼈마디를 부러뜨리면 뚝뚝뚝 비가 내린다

내 마음의 장독대에도 깊숙이 비가 내린다

어머니는 급히 뒤뜰에 열어진 장독대를 닫고

큼직한 널빤지와 돌을 얹혀 놓는다

난 장독대를 닫는 일을 지주 잊어버렸다

무엇보다 널빤지와 돌이 나에겐 너무 버거웠다

 

장독대는 바람이 잘 드는 곳에 두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두고

새벽에는 장독대를 열어 신선한 공기를 맞게 하고

비는 절대 맞게 하지 말라시던 어머니의 네 가지

비법을 내 졸음은 스쳐가는 인연처럼

잊게 했다

 

며칠간은 비만 퍼부었다

저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지독히도 싫었다

작은 두 손을 하늘 위로 펼쳐 내리는 비를 막아본다

가슴에 대고 내 마음의 장독대를 가려도 본다

비가 그쳤을 무렵 장독대를 열었을 때

가지 않을 것 같던 내 사랑이

가버렸구나

 

 


 

사과와 다시 빌헬름텔에 대하여

 

 

허름한 부엌 구석에 냉장고 하나 물구나무 선채로 놓여 있다

그 냉장고로 가기 위해 나 또한 물구나무 선 채로 다가간다

냉장고에서 덩굴들이 뻗어 나와 어두운 집들을 휘감는다

번데기가 된 집 속에서 새벽이면 사람들은 나비로 변해 빛 속을 날아다녔다

 

냉장고 아에서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습관처럼 우산을 펼친다

냉장고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통로이다

가끔 중세시대의 말을 탄 기시들이 나와서 내 머릿속 아름다운 꿈들을

짓이겼다 유성 하나가 달려가는 길고양이 꽁무니를 태운다

그런 날이면 내 방은 풀잎 하나 피어나지 못하고 낙엽만 쌓여 불탔다

 

불면증을 가진 엄마는 가끔 냉장고 안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폰으로 나에게 자정은 넘지 말고 자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적당히 낮은 온도가 사그라지는 엄마의 영혼을 신선하게 했다

엄마의 눈물은 그래서 언제나 차갑다

 

난 매일 아침마다 신선한 사과 하나를 먹는다

냉장고 안에 사과가 있기를 세 번의 기도를 하고 세 번의 기침을 한다

빛 속에서 화살 하나 날아와 냉장고를 뚫고 사과에 박힌다

다른 세계에서 온 그의 이름은 빌헬름텔이다

나를 죽이려 했지만 다행히도 난 빛으로 채워진 세상 속에서 단단히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와 그의 추종자를 돌려보내기 위해 사과를 먹는다

사과를 매일 냉장고에 넣어 두고 빌헬름텔에게 매일 사과한다

빌헬름텔은 무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나다

그들이 원하는 건 빛 속에서 온 빨간 사과 하나였으므로,

 

다시 어둠 속에서 냉장고를 부수기 시작했다

다른 세계에서 살고 싶다

죽음에 기울어진 차가운 영혼이 얼음처럼 부서져야

그곳이 다른 세계일까

다시 냉장고 안 얼음을 어그적 어그적 씹으며 잠이 든다

 

 


 

검은 울음

 

 

폐타이어들이 창고 구석에 잠들어 있다

뱀이 또아리를 틀어 동면 하듯이 잠은 깊고 투명했다

어둠속에서 불빛을 찾아 헤매던 사내들이 죽어 폐타이어로 변했다

폐타이어에서 사내들이 울음소리 들린다

폐타이어는 심장이 없었다 죽어가던 사내들은 심장을 꺼내

빗방울을 털고 있는 나비의 날개 속에 감추었다

고무 가죽만이 차가운 영혼을 감싸고 떨어지는 꽃잎 주위에 서성거렸다

비가 내리면 창문 틈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타이어의 몸에 고였다

비를 맞고 있는 노숙인 같았다 붉은 눈물이 되어 흐른다

폐타이어의 몸에서 눈먼 소년의 피리소리가 흘러나왔다

피리소리 어둠 속에서 박쥐들을 깨우고 한 무리의 박쥐들이

영혼이 가난한 소년의 눈동자를 파먹었다

쓸쓸한 눈동자에서 고무 타는 냄새가 검은 울음 되어 새어 나온다

난 이상한 사람처럼 폐타이어를 몸에 걸치고 골목을 유령처럼 돌아다녔다

지쳐서 쓰러지면 낙엽이 되기도 했다 죽음 가까이에 있을 때 낙엽이 제일 편안했다

나는 이렇게 어둠 속에서 홀로 침전하며 쓸쓸히 사라지고 싶지 않아

폐타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썩은 죽음의 냄새가 지독히도 역겹다

 

눈을 잃은 소년은 타이어를 하나씩 꺼내 지붕 위에서 굴렸다

깊고 단단한 근육을 가진 타이어들이 아스팔트 위를 굴러다닌다

바람처럼 죽은 사람의 몸 위로 지나갔다

그 타이어 자국이 슬픈 흉터처럼 눈이 부셨다

마침내 타이어들은 우주 속 투명한 풀벌레들이 살고 있는 행성으로 향했다

 

폐타이어들이 사라진 창고 구석에 알몸의 노인이 동전처럼

몸을 잔뜩 웅크려 잠을 자고 있다 꿈속에서 깨어나 가끔 울음을 터트린다

나는 잠들지 않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

울음은 끝없이 바람과 함께 떠 돈다

 

 


 

내 영혼 속에 앉은 나비

 

 

기차를 타고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숲속으로 갑니다

그곳은 차가운 밤만 있는 곳이죠

빛들은 모두 불타버린 나무의 뿌리 속으로 숨었죠

기차 뒤로 수많은 나비들이 쫓아옵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나비 한 마리가 내 눈동자에 고인 슬픔을 물고 사라졌죠

그거 아시나요 나는 전생에 나비였어요 아마도 다음 생에도 나비일 거예요

내가 낳은 아기도 나비였어요

난 어두운 밤이 되면 아름다운 나비로 변해 아픈 아이들에게

나의 심장을 나누어 주죠 그래서 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늙어요

난 흐느끼며 울고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아픈 사람이었거든요

엄마의 아늑한 자궁 같은 번데기에서 얼마나 많은 희망과 행복을

생각했을까요 나는 날개 하나가 부러져 나의 비행은 항상 위태롭습니다

바로 앞좌석에 앉은 중절모를 눌러 쓴 곱슬머리 노신사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땅콩과 오징어를 팔던 어린 소년은 안개꽃이 피어 있는 이름다운 화분을

나누어 줍니다 나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잠이 듭니다

사람들이 모두 잠의 든 사이 나비들이 안개꽃에 앉아 사람들의

죽은 그림자를 물고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차장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어요

나비들은 날개가 젖어도 서글픈 울음을 참고 있어요

우리도 이 어둠을 참아내야죠 견고하고 아름답게

나를 기억해줘요 나는 당신들의 흘린 영혼이랍니다

당신들의 눈동자에 뛰어드는 빗소리랍니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가장 멀리 날아갈 겁니다

당신의 가벼운 날갯짓으로, 영원히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시와 세계,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