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바론 절벽*
어쩌랴, 절벽 아래 저 파도를 어쩌랴
방향키 놓쳐버려 떠밀리고 떠밀려온
추자도 하늘길 따라
소금꽃이 피었다
나바론의 요새에 숨어든 병사들처럼
오늘 밤 태풍 전야 고요를 방심 마라
구절초 봉오리 쓸며
구구절절 되새기는
어쩌다 사는 일이 벼랑 끝에 서 있는 날
누군가 뭍으로 와 자일 하나 건네면
등 시린 저 꽃들조차
바람이고 싶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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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자도에 있는 절벽이 나바론 요새를 닮았다 해서 지은 이름.
♧ 자작나무 소묘
누구의 눈빛으로 위로되는 날 있지
어제를 묻고 온 자작나무 숲속에
묵묵히 바람 맞서며 속살 한 겹 벗겨내는
아무리 힘들어도 구부리진 않았어
하늘이 내어준 그 높이를 따라갔을 뿐
지나는 길손에게도 손 내민 적 없었네
한겨울 꼿꼿함에 너를 보며 견뎠어
사계절 아랑곳없이 덕질에 덕질해도
몇 해를 보내고서야 그제야 알게 됐지
때로는 휘인 가지에 이별을 불러오듯
한순간 솟아오르다 지는 게 사랑이라고
아직도 불시 한 점이 나를 향해 당기네
♧ 상사화
숭숭 뚫린 현무암 올레 밖을 서성이다
기어이 장맛비에 터져 버린 붉은 가슴
젖은 채 맨발인 그대 괜찮을까, 괜찮을까
♧ 외면했던 날, 뒤에 오는
꽃이 진 후에도 느닷없이 꽃은 또 피어
한겨울 오름 등성이 벌겋게 얼린 철쭉
선홍빛 시간을 녹일 햇살 한 줌 그립다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 (한그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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