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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7)

by 김창집1 2024. 7. 12.

 

 

시작노트 4

 

 

절부암 앞에 서면

그 모든 것들이 시간의 풍화를 견디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삶의 번민과 슬픔을 바다에 적당히 절여둔 채

오롯이 나를 항하고 있었다

더하고 덜한 것 없는 본모습을 깨우며

각자의 리듬으로 끊임없이 풍화를 견뎌내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무너져 내리지 않기 위해

 

 


 

어마 넉들라*

 

 

  놀라서 넋 났구나

  우리 아기 어마 넉들라

 

  일상은 원시부족 언어처럼 끄덕이거나 가로젓는 몸짓으로도 불편함은 없었다

  은빛 갈치처럼 싱싱하던 말들이 절부암을 보이며 오래도록 수상되어 있었다 푸른 혀를 잘라 어둠에 묻던 날 나는 말을 잃었다 망각은 기역 세포를 일깨우며 바다에 서 있었다 어마 넉들라 어마 넉들라 주문이 분주한 중에도 용수리 포구에는 배가 드나들더라 그러니 기꺼이 머리를 기울여 중심을 잡고 침묵을 돌보았지 내 머리가 하얗게 창백해질 때까지, 이 마법 같은 의식이 하얗게 물들 때까지 어마 넉들라 어마 넉들라 머리에 물 적시며 푸푸 내 얼굴 위로 환하게 휘몰아치던 그해 겨울의 맛

  그때는 알지 못했다

  허덕였던 기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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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 넉들라 : ‘어린아이가 크게 놀랐거나 넋을 잃었을 때, 어머니나 할머니가 아이를 감싸 안고서 바가지에 물을 손으로 적셔 머리 위에 뿌리거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넋이 되돌아오기를 빌며 주문처럼 되풀이하면서 외는 말의 제주어.

 

 


 

빈 올레 돌다*

 

 

벚꽃 피면

습관처럼 그대가 생각나듯

살갑던 연심엣말**

날리는 꽃잎 몇 점

당신의 흔적들이 모여

나풀나풀 떨어지네

 

내 몸에

아니 네 몸에

이 골목, 이 땅 위에

누군가 오래도록 기다릴 것만 같아

저 향기

바람이 밀어

피다만 꽃이 진다

 

허기진 이런 봄날

수신도 발신도 없는

목젖을 짓누르는

아픔의 시가 되어

온종일 빈 올레 돌다

초록 짝을 틔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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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올레 돌다 : ‘찾아갔는데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다의 제주어.

** 연심엣말 : ‘어떤 사연으로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말의 제주어.

 

 


 

히아신스

 

 

동지섣달

긴긴밤

무슨 꿈꾸었길래

 

빈자리 하나 없이

꽃송이로 채웠나

 

알겠다

사방 천지에

향기를 뿌리는 꿈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동학시인선122, 2024)에서

                                          *사진 : 수채화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