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의 숲
어느새 텅 비워낸 어리목 산정길엔
치열했던 시간을 하나둘 지워가며
휑하니 남 밑둥치
빗장 푼 햇살 한 줌
‘낙엽은 떨어지는 게 아니라 내려놓는 거다’
바람 속에 스쳐가는 문구 하나 떠 올리며
예전에 굳게 닫았던,
움켜쥔 손 펴 보네
♧ 빙벽氷壁
-왕이메 고드름
하늬바람 쌩쌩 부는 들판에 나 앉아
발가락이 얼도록 오름 한 바퀴 돌아도
구석진 담벼락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온기라곤 하나 없는 얼어붙은 세상 앞에
벼랑 끝 거꾸로 선 엘사*의 눈물 같은
언젠가 얼음 방에도 봄은 꼭 오리라는
---
*엘사 : 에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의 여 주인공.
♧ 길 없는 길 위에서
가끔 사는 일 또한 헷갈릴 때 있다
사랑도 미움도 흔들리던 내 발자국도
어쩌면 걸어온 길이 착시였는지 몰라
♧ 무인도
사람도 섬이 되는 그런 날이 있다
저녁이면 물안개 이불처럼 덮여오는
새소리 물소리 잠든
해안가를 맴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좁혀서야 보이는
출렁이던 시간도 파도 속에 묻힌 채
결핍된 마음 한 자락 행구고 또 행구는
썰물이 지난 자리 밀물이 차오르듯
이제 막 무장해제 하루를 재워놓고
다려도 저녁놀 속에
순한 손을 담근다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 (한그루, 2024)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2) (2) | 2024.07.22 |
---|---|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 발간 (0) | 2024.07.21 |
월간 '우리詩' 7월호의 시(3) (0) | 2024.07.19 |
오승철 유고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의 시(7) (1) | 2024.07.18 |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의 시(12) (0) | 2024.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