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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7월호의 시(4)

by 김창집1 2024. 7. 24.

 

 

방하放下 - 남택성

 

 

사라진 성주사

넓은 절터에

하얗게 내린 망초꽃

 

이 많은 눈은 어디서 오나

 

낭혜화상탑비, 오층석탑, 삼층석탑을 지나

눈과 코와 입이 뭉개진 석불입상 앞에 선다

닫힌 문 앞에서 거처를 묻는 천 년의 적막

무현금을 타는데

 

절터를 지키고 선 불상의 마음을 읽느라

나는 오래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데

 

지워도 지워도 돋아나는 생각은 어디서 오나

 

절 없는 절

새하얗게 흐드러진 칠월의 눈

망초꽃 위로 날아오르며

금강경을 읽는 나비

 

이 밝은, 반야의 눈은 어디서 오나

 

 


 

보면 보이는 그림 - 도경회

 

 

모내기 끝난 무논에

뜬 모를 심던

모가지 깃대처럼 높은 백학 한 마리

 

선학으로 날아올라

돗바늘로

하늘 자락 시치며 날아간다

 

아득히 흘러가서

칠 짙은 밑그림 위에

백합화를 수놓아 다오

 

구름다리 너머 둥글게 떠 있는 무지개도 보인다

창포물에 머리 감던 가슴이 그리움에 빠져서

풀물 든 손바닥에

네 이름을 쓴다

 

 



고장 난 전축 - 민구식

 

 

소리가 날까?

반신반의하면서도 바늘이 올려지니 판이 돈다

지지직거리며 거친 숨 고르기를 한다

나지 않아야 할 울고불고 비명이 들리고 한참을 헛돈다

소란스럽기는 어느 판에나 있는 법이지

시대는 앞서가도 판이 옛날 판이라서 그렇지

제목이 바뀌고 음절도 박자도 두서가 없지만

자신만이 옳은 판이라고

원심력을 구심력이라고 우기며 헛구역질을 한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흥남부두에서 출발하더니

이별의 부산정거장으로 도착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판 돌리기

어설픈 세상 구하기 이음새 논리가 반도를 덮는데

가만히 들어 보면 제 밥그릇 챙기기 위한 포장술일 뿐

판을 뒤집어 돌려봐도 이미 전축은 고장이 났다

판을 갈아도 그 기계에서는 새로울 수가 없다고

덜컹거리는 이미자가, 누워버린 나훈아가

목쉰 소리로 간절하다

 

 


 

박꽃을 닮은 딸에게 이수미

 

 

하안 박꽃이 오각형 몸을 하늘로 열던 날

네가 태어났지

 

이른 아침 초가지붕에 함초롬히 피어난 꽃봉오리처럼

조그만 입으로 오물오물 젖을 먹는 네 모습이 신기해서

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지

온 우주가 내 앞에 펼쳐진 순간이었지

 

어둠 속에서 흰빛을 내뿜는 꽃

소박하면서도 의연한 기품을 지녀

절로 바라보게 되는 꽃

 

박꽃 같은 너에게 스며들어 한평생 살다 보니

내 앞에 펼쳐진 우주는 늘 눈이 부셨지

 

 

                       * 월간 우리7월호(통권 제43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