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우봉 휘파람새
바람 드센 섬에서는 파도에도 멍이 드나
가파르게 잘려나간 몬주기알 벼랑 아래
근 백 년 멍자국처럼
시퍼렇게 이는 물빛
머리 푼 회리바람 삼각파도 몰고 오면
메밀꽃 핀 물마루에 절을 하는 북촌 바다
대 끊긴 제삿날 아침 파랑경보가 내리고
오래전 탄흔單痕 같은 진지동굴 구멍마다
비명에 간 휘파람새 울음소리 묻은 뜻은
여태도 참회의 굿판
열지 못한 까닭이다
♧ 쥐불놀이
1.
거문오름 검은 숲에 장작불이 활활 탄다
짐승 같은 바람 소리 살갗을 부풀리고 걸어선 갈 수 없는 굼부리 능선 따라 죽창을 불태우며 한껏 달뜬 불티들이 죄 없는 영혼인 양 별로 뜬 초승 하늘, 모반의 칼날 하나 싸느랗게 걸릴 동안 연착된 봄꽃 서넛 용암굴로 숨어든다, 꾹 다문 입술마다 피어나는 푸른 살기 팽팽하게 일어서는 모들 뜬 눈빛들이 등 둥 등 북소리로 가슴골 울려오면 흙빛으로 굳은 낮엔 찬 이슬이 매달리고 비나리 비나리치듯 무릎이 꺾이는 밤
저 깊은 어둠의 장막 누가 와서 걷을까
2.
시르죽은 잿불마저 자지러진 액막이굿판
숨소리만 설설 끓는 무너진 돌담 사이 밤 도운 불꽃들이 혓바닥을 날름대고 대가 튀듯 콩을 볶듯 작두 탄 총소리가 바리데기 뜀박질로 자정을 밀고 갈 때, 삼촌 원죄까지 대신 업은 애기업개 산철쭉 붉은 꽃술에 하혈 왈칵 쏟아낸다. 시퍼런 바다에 갇혀 갈기 세운 파도의 섬 붉가시 종가시가 파랑주의보 발령하고 천남성 핏빛 열매 독기를 내뿜는데, 박수도 신명도 없는 허튼 굿판 한가운데 낙엽만 쌓여가는 곶자왈 한 굽이를 애면글면 에돌아 온 절뚝발이 그 시월을
움펑눈 돌하르방도 찌푸린 채 맞고 있다
♧소드방놀이*
노을의 불티들이 흩날리는 제주목 관아
가마솥 뚜껑 하나 동헌 뜰에 놓여지고
걸궁패 굿장단에 맞춰 북소리가 울린다
떼까마귀 잡설 같은 허튼소리 들어나 볼까
죽이 익을라몬 아직도 멀었고 그냥 내쳐 기다리기도 하 심심한께, 빌어묵을, 심심풀이 삼아 소드방놀이나 한판 벌여볼까나? 요놈의 놀이 내력 들어볼라치면 오리汚吏는 쓸어내도 있고 일소해도 있어. 몰아내도 있고 추방해도 있어. 뿌리 뽑아도 있고 근절해도 있어. 자, 그러니 어쩔거나? 빌어묵을, 이주 꼬르륵 증발시켜 버려야제. 끓는 가마솥에 달궁달궁 삶아내어 아주 씨알머리를 죽여야제.
그 생각 장히 좋으나
허허, 누가 누굴 죽일꼬?
누가 누굴 벌줄거나? 죄 없는 놈 어디 있다고?
내 죄 대신 업은 놈을 어찌 그리 삶아 죽여? 넨장 젠장 별 수 없네. 진퇴양난에 고육지책이라 아궁이에 불을 빼고 식은 불이나 때야것네. 시늉불이나 넣어야것어. 에라, 그것도 번거롭네. 소드방 하나 달랑 놓고 올라가라 해라. 엄살한 번 되게 피고 죽는 시늉이나 하라 하것다. 허허, 요렇게 솥 찜질은 시늉만 남고 탐관오리 벌주는 일도 껍질만 남고 상징만 남아 허구한 날 아무 말썽 없이 전해 내려오는 것
총 쏘고 뭍으로 내뺀 귀신들
벌 받으며 낄낄대는 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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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드방’은 ‘솥뚜껑’을 이르는 제주도 말. 끓는 가마솥에 죄인을 삶아 죽이는 ‘부형(釜刑)’을 일컫지만, 실제로는 아궁이에 불을 때는 척하면 죄인이 죽는 시늉을 해 보이거나, 심지어는 솥뚜껑 하나 달랑 갖다 놓고 거기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으로 끝나기도 했음. (※현기영의 동명소설에서 내용 일부 참조).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 (고요아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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