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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7월호의 시(8)

by 김창집1 2024. 8. 5.

 

 

배롱나무 혀끝 임미리

 

 

기억을 지운 폐선로 위를 걷는다

한때는 석탄을 실어 날랐던 선로

이제는 세월을 뒤척이는 바람개비뿐

길 건너 붉어진 배롱나무

돌고 싶은 바람개비의 소원을 훔쳤을까

뒤안길에서 닫혀버린 문 열어

스민 볕에 물오른 염원이 돋아난다

배롱나무 혀끝에서 톡톡 꽃잎이 벙근다

증발한 것들의 녹록함을 안다는 듯

그 길 부끄럽게 어루만져 말랑거린다

멀어져 가는 위로 몇 잎을 핥는다

붉은 꽃잎 나비처럼 날아오른다

 

 


 

이방인 시편 장성호

    - 어떤 푸른 풀꽃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길가에서 얼굴이 얽은 한 남자가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달라며 운다

그는 어릴 때 오로지 외할머니랑 지내면서

감기를 달고 살았고 천연두와 홍역까지 걸렸다

그는 길눈이 어두워 버스를 잘못 타거나

지하철을 놓치기 일쑤였다

그는 평생 일을 먼저 벌여 놓고

뒷감당을 못해 하는 일마다 망했다

그는 어쩌다 오솔길을 걸으려고 나서면

그만 소나기를 만나기 다반사였다

평생 손수레를 끌며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이런 재수 없는 일을 깨 줄 수 있는 게

오직 사랑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느 날 길을 걸으며 오랫동안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푸르다

그녀는 아직도 푸른가, 그래

아뿔사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주변엔 낙엽만 뒹굴고 있었다

그가 딱 한번 사랑에 빠졌었는데,

숲속 푸른 풀꽃 피었던 빈자리를

한 남자가 하염없이 바라보며 운다

 

 


 

숨은 벽 남택성

 

 

슬픔이 대나무처럼 자라는 푸른 집으로 가요

 

하늘말나리가 피는 오솔길을 지나야 해요.

길은 하나가 아니어서

예기치 않은 오르막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아요

 

흰가시광선버섯은 아예 모른 척해요

슬픔은 때로 치명적인 독이니까요

자주 생각에 빠지는 징검다리와

툭하면 다른 쪽으로 빠지는 길

 

비가 내리면

없다가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산길에 서서

 

있다가 없는 것을 골똘히 생각하기도 해요

 

 

                               *월간 우리7월호(통권 43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