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감꽃 I
한라산 치마폭마다
백설의 자국으로
이리도
하안 불을 켜는가
물안개인 듯
별들이 머리 빗으며
향기 품는 하늘
햇빛 내린 언덕 아래
초가집 두서너 채
한라산을 얘기한다
섬을 비집어 온 파도 소리가
꽃술의 안쪽으로 스러지는 듯
발 벗은 담쟁이
사뿐히 꽃잎 새 위로 건너고 있다
백록담에 눈이 큰 꽃사슴
목마른 밤이면
달이 없어도
훤히 밝은 앞 냇가에
이뿐 순아 홀로 빨래질하네
♧ 밀감 꽃 Ⅱ
고웁게 가난이 피었소
저녁 바람 스쳐오면
삐걱대는 문
떠나는 것은 가게 두고
돌아서서 쏟아지는 가난이 피었소
서귀포 창마다 등불을 켜고
허기진 빈 주낙배 돌아오면
아아, 맨살을
떼어내는 바다여
파도 소리에 꽃잎이 떨리는
마을은 뿌옇게 가난이 피었소
♧ 서귀포
한라산 동짓달이면
원통
밀감으로 뒤덮이는 마을
골목마다
향기가 사뭇 연기 인양하고
잎새 끝에 바람이
머리 묻으면
하늘을 흐르는 어부의 노래
이여도 하라
이여도 하라
동백나무집 순이네 울타리에
담쟁이 넌출 기어올라
노오란 닭들은
천년을 구르다 녹슨 수레바귀 위로
마음 놓고 뛰어다닌다
한라산 치마폭엔
꽃구름이 더 큰 산을 이루고
저녁 가마귀
그 위를 머리 풀며 날으고 있다
눈이 사풋사풋 내리는 밤이면
창 불을 꺼도
훤히 밝은 앞바다에
평화롭게 들려오는 흥겨운 노랫가락
이여도 하라
이여도 하라
♧ 아침 풀잎 Ⅰ
문득 손 사이로
놓치는 이슬 있어
버리는 모든 것은
버려지고 있나니
간절한
바람결에도
못 가리는 네 얼굴
우리의 아침은
늘 설레는 몸짓이다
버린 것이 있다면
어젯밤의 저 언덕
살수록 알 것만 같은
한 하늘이 펼쳐있다
♧ 아침 풀잎 Ⅱ
간밤에 귀또리가
저리 곱게 울었고나
떠밀리듯 떠밀리듯
흔들리는 풀잎 사이
더불어
귀한 눈물을
버려두고 갔구나
*오승철 유고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 (다층,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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