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 숲
사막에 꽃 피우는 낙타 풀 가시처럼
언제나 바람 맞서 궁굴리며 궁굴리다
하나둘 비워내 가며
가벼워지는 숲이네
늦가을 존자암 무게 진 산 중턱
푸르게 푸르게 푸르게 더 푸르게
우듬지 햇살을 잡는 상수리나무 어머니
한 번도 제 둘레를 재어본 적 없는 당신
검버섯 핀 손등 아래 염주 알 굴리는
어머니 야윈 생애가
곧추선 적 없었네
♧ 노란 지팡이
꿈이듯 생시이듯 어머니 떠나신 뒤
주인 없는 빈집에 동그마니 노란 지팡이
해종일 졸고 있다가
골목길로 접어선
헛헛한 생각들 호주머니 속 꺼내 들고
행방을 알 수 없어 바람마저 주춤대는
네거리 신호 앞에서 갈 길을 묻는다
어깨 한쪽이 휘도록 버스는 오지 않았다
돌아설 수도 건널 수도, 발만 동동 구르다
어머니 노을 진 저녁
혼자 길을 건넌다
♧ 가을장마
한여름 놓고 간 게 기억이 없으신지
십리 길 따라가다 제정신이 들어서
내 여기 왔더냐? 하며 되물으시는 어머니
몇 날 며칠 닦아도 시린 하늘 떠받듯
단단히 뿌리내리라고 무른 땅 토닥토닥
내 안에 고인 슬픔을 씻기고 또 씻긴다
♧ 반지기밥*
그 오랜 잔설같이 기억 속에 살아있는
아버지 밥상 위 김 오르던 반지기밥
오월의 가로수길에
이팝나무 꽃피었네
배불리 먹어보라고 아버지의 고봉밥
한 숟갈 덜어주시고 짠하게 웃어주시던
아무리 먹고 먹어도
허기로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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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기밥 : 보리쌀 위에 쌀 한 줌 얹어 지은 밥.
♧ 아버지의 바다
-용천수
날마다 해가 뜨고 노을이 지듯이
흐르는 일만큼은 멈추지 않는다
밀물과 썰물이 지난 자리
안부를 물을 뿐
우직한 아버지의 미소는 잔잔했다
수평선 마주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때로는 거친 지팡이 차가운 매를 드시던
바닥에서 솟구치는 저 힘의 근원을 보라
그 연하디연한 물줄기에 심지를 박듯
억만년 물의 경전은
흘러도 그대로다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 (한그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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