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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의 시와 순비기 꽃(7)

by 김창집1 2024. 8. 25.

 

 

어머니 숲

 

 

사막에 꽃 피우는 낙타 풀 가시처럼

언제나 바람 맞서 궁굴리며 궁굴리다

하나둘 비워내 가며

가벼워지는 숲이네

 

늦가을 존자암 무게 진 산 중턱

푸르게 푸르게 푸르게 더 푸르게

우듬지 햇살을 잡는 상수리나무 어머니

 

한 번도 제 둘레를 재어본 적 없는 당신

검버섯 핀 손등 아래 염주 알 굴리는

어머니 야윈 생애가

곧추선 적 없었네

 

 


 

노란 지팡이

 

 

꿈이듯 생시이듯 어머니 떠나신 뒤

주인 없는 빈집에 동그마니 노란 지팡이

해종일 졸고 있다가

골목길로 접어선

 

헛헛한 생각들 호주머니 속 꺼내 들고

행방을 알 수 없어 바람마저 주춤대는

네거리 신호 앞에서 갈 길을 묻는다

 

어깨 한쪽이 휘도록 버스는 오지 않았다

돌아설 수도 건널 수도, 발만 동동 구르다

어머니 노을 진 저녁

혼자 길을 건넌다

 

 


 

가을장마

 

 

한여름 놓고 간 게 기억이 없으신지

 

십리 길 따라가다 제정신이 들어서

 

내 여기 왔더냐? 하며 되물으시는 어머니

 

몇 날 며칠 닦아도 시린 하늘 떠받듯

 

단단히 뿌리내리라고 무른 땅 토닥토닥

 

내 안에 고인 슬픔을 씻기고 또 씻긴다

 

 


 

반지기밥*

 

 

그 오랜 잔설같이 기억 속에 살아있는

아버지 밥상 위 김 오르던 반지기밥

 

오월의 가로수길에

이팝나무 꽃피었네

 

배불리 먹어보라고 아버지의 고봉밥

한 숟갈 덜어주시고 짠하게 웃어주시던

 

아무리 먹고 먹어도

허기로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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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기밥 : 보리쌀 위에 쌀 한 줌 얹어 지은 밥.

 

 


 

아버지의 바다

    -용천수

 

 

날마다 해가 뜨고 노을이 지듯이

흐르는 일만큼은 멈추지 않는다

밀물과 썰물이 지난 자리

안부를 물을 뿐

 

우직한 아버지의 미소는 잔잔했다

수평선 마주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때로는 거친 지팡이 차가운 매를 드시던

 

바닥에서 솟구치는 저 힘의 근원을 보라

그 연하디연한 물줄기에 심지를 박듯

억만년 물의 경전은

흘러도 그대로다

 

 

                           *장영춘 시집 달그락, (한그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