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악산 까마귀
봄이면 깃을 치는 온기 없는 햿살 아래
세월의 각다귀들 까마귀가 떼로 산다
먼발치 섯알오름을 들면 날면 헤집으며
궁근 가슴 죄어오는 저 성찬의 아지랑이
유채꽃 수선화의 예비검속 눈길을 피해
추깃물 고인 연못에 검은 부리를 씻는다
배동바지 보리까락 날갯죽지 파고들 때
어디로 떠났을까, 검정 고무신의 주인들
모슬포 뱃고동 소리 한 척 폐선 깨우고
환해장성 물들이던 핏빛 놀도 잦아들면
만벵듸 백조일손百祖-孫 열어놓은 뱃길 위로
초승 빛 조각배 하나 이어도로 가고 있다
♧ 마라도 기는 길
바다는 일주일째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
넋 놓은 사람들의 머리채를 꺼두르며
바람은 메밀꽃 위에 악다구니를 쏟아낸다
길이란 길 죄다 끊긴
이 금단의 해역에서
뭍 소식 기다리며 까맣게 속만 태우다
수평 끝 물마루 아래 납작 엎딘 작은 섬
갈래야 갈수 없는
섬이 어찌 너뿐이랴
네게로 기는 길은 오늘도 열리지 않고
어느새 낮술에 취한 서쪽 하늘이 불콰하다
♧ 물의 딸
할망은 아기상군,
설문대의 딸이었다
해감 못한 거친 날숨 을레에 풀어놓고
하도리 잠녀조합에 빗창을 꽂기 전엔
어멍의 물소중이도
마를 틈이 없었다
무자년 거센 불길 조간대로 번질 때쯤
비로소 불덕 에 누워 물숨을 들이켰다
바람 타지 않는 섬이
어디에 있겠냐며
파도치는 물마루에 테왁을 띄우던 이들
그날 그 숨비소리가 망사리에 가득하다
바당이 우는 날엔
나도 따라 물에 든다
중군도 하군도 아닌 똥군이란 별을 달고
할망과 어명이 좇던 이어도를 캐기 위해
♧ 불카분낭*
화산섬 산과 들이 국방색으로 타오를 때
동백꽃 빛 울음들이 돌담으로 막혀 있는
선흘리 초입에 서면 발바닥이 뜨거워진다
마을 안 올레에는 시곗바늘 멈춰 있다
온몸에 화상 입은 후박나무 늙은 둥치가
곰배팔 가지를 벌려 옛 상처를 보듬는 길
곶자왈 용암굴이 연기 속에 무너지고
별빛마저 소스라치던 그 새벽 그 총소리
나이테 헛바퀴에도 정낭을 걸이야 했다
기나긴 겨울 지나 새살 돋는 나목의 시간
숯등걸 덴 가슴에 봄을 새로 들이려는
뼈저린 나무의 생이 핏빛 놀을 털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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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에 타버린 나무’라는 뜻의 제주도 토박이말. 제주 4․3 당시 군경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기적적으로 되살아난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 있는 나무.
♧ 사라오름
성판악 삼나무 숲에
향불처럼 피는 안개
방부목 계단에 널린 낙엽을 비질하며
바람은 억센 손길로
내 무릎을 꺾는다
마른 떨켜 샅을 뚫고
갓 눈 뜬 어린 가지
빛바랜 사초史草 향해 궐기하듯 일떠설 때
까마귀, 오름 까마귀
목구멍이 뜨겁다
수천수만 울음들을
가둬 놓은 저 백록담
언제쯤 이 봉분 앞에 폭포수를 쏟아낼까
그날 그 진달래 꽃빛
사월 하늘 붉히는데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 (고요아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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