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을 씻으러
태풍이 지다간 하늘은 며칠째 우울하다
짙은 회색 거리에는
바람이 공놀이를 하며
플라타너스 잎을 이리저리 몰고 다닌다
돌담에 담쟁이 누렇게 말라기는
골목길 돌아 바다로 간다
퀵 오토바이가 곡예를 하듯 지나가고
산책하는 사람
마라톤 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낚시하는 사람
바다를 구경하는 사람
물질하는 해녀들
갯가 좌판에서 해산물을 사 먹는 사람들
하늘은 보채는 어린아이와 같이 울상이어도
해안도로는 우울을 몰아내는 따로국밥
사람들은 한 꺼풀씩 구름을 거둬간다
무거운 발걸음에도 바람꽃이 피어난다
텁텁한 입안에서는 솜사탕 같은 구름이
녹아내린다
♧ 녹차 들깨 수제비를 먹던 날
흙길을 걷다 정자 옆에
아카시아꽃 만발하여
너도나도
추억을 소환하며
한 소식 전한다
아카시아 줄기 하나 꺾어
너는
아들 딸 아들
딸딸 먹고
너 나 너 나
좋아한다
여린 잎을 먹는다
추억은 뭉게구름으로 흐르고
입안은 화사하고 고소하여
꽃향기 멀리멀리 하늘을
헤엄쳐간다
매콤한 아궁이 앞에서
눈 비비며 수제비 끓이던
고향 집 정지를 불러들여
오늘은 연우네 집에서
투박한 그릇에 아카시아 여린 잎을 담아
언니와 함께
오월의 추억을 먹는다
♧ 이름 따라
끝장 떡볶이집 출입문은 굳게 닫은 지 오래
바람에 먼지 수북이 쌓이고
피부병을 앓았는지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정신줄 놓은 노인네같이 멀거니 앉아있다
그도 한때는 팔팔하던 때가 있었겠지요
밤새 풍선을 불며
주름살 없는 탱탱한 얼굴로
손발 분주했겠지요
와글와글 아이들이 모여들어
서로서로 끝장을 내겠다고
첫날부터 벼루었으니
주인장도 덩달아 수화기를 들기만 하면
끝장입니다
끝장입니다
정말로 끝장을 내고 말았네요
♧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 정류소에 한 노인이 앉아있다
불볕더위에 닭벼슬 같은 모자를 여러 개 포개 쓰고
지난날의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듯
모자 위에 모자 모자 모자
작은 키를 더 무겁게 누르고 있다
한라산의 정기를 받은 듯한
부리부리한 눈
날카로운 코
굽은 등에 지팡이를 짚고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때 묻은 비닐 가방 하나 옆에 놓고
두고 갈 세상이 사뭇 아쉬운 듯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사발 깨지는 분노를 던진다
종점을 바라보며
어느 시인처럼
한 세상 아름다운 소풍이 있노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언제 올 것인지
종점은 아직 멀었는지
나는 언제 내려야 할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김순선 시집 『어느 토요일 오후의 시』 (한그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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