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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16)

by 김창집1 2024. 8. 22.

 

 

송악산 까마귀

 

 

봄이면 깃을 치는 온기 없는 햿살 아래

세월의 각다귀들 까마귀가 떼로 산다

먼발치 섯알오름을 들면 날면 헤집으며

 

궁근 가슴 죄어오는 저 성찬의 아지랑이

유채꽃 수선화의 예비검속 눈길을 피해

추깃물 고인 연못에 검은 부리를 씻는다

 

배동바지 보리까락 날갯죽지 파고들 때

어디로 떠났을까, 검정 고무신의 주인들

모슬포 뱃고동 소리 한 척 폐선 깨우고

 

환해장성 물들이던 핏빛 놀도 잦아들면

만벵듸 백조일손百祖-열어놓은 뱃길 위로

초승 빛 조각배 하나 이어도로 가고 있다

 

 


 

마라도 기는 길

 

 

바다는 일주일째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

 

넋 놓은 사람들의 머리채를 꺼두르며

바람은 메밀꽃 위에 악다구니를 쏟아낸다

 

길이란 길 죄다 끊긴

이 금단의 해역에서

 

뭍 소식 기다리며 까맣게 속만 태우다

수평 끝 물마루 아래 납작 엎딘 작은 섬

 

갈래야 갈수 없는

섬이 어찌 너뿐이랴

 

네게로 기는 길은 오늘도 열리지 않고

어느새 낮술에 취한 서쪽 하늘이 불콰하다

 

 


 

물의 딸

 

 

할망은 아기상군,

설문대의 딸이었다

 

해감 못한 거친 날숨 을레에 풀어놓고

하도리 잠녀조합에 빗창을 꽂기 전엔

 

어멍의 물소중이도

마를 틈이 없었다

 

무자년 거센 불길 조간대로 번질 때쯤

비로소 불덕 에 누워 물숨을 들이켰다

 

바람 타지 않는 섬이

어디에 있겠냐며

 

파도치는 물마루에 테왁을 띄우던 이들

그날 그 숨비소리가 망사리에 가득하다

 

바당이 우는 날엔

나도 따라 물에 든다

 

중군도 하군도 아닌 똥군이란 별을 달고

할망과 어명이 좇던 이어도를 캐기 위해

 

 


 

불카분낭*

 

 

화산섬 산과 들이 국방색으로 타오를 때

동백꽃 빛 울음들이 돌담으로 막혀 있는

선흘리 초입에 서면 발바닥이 뜨거워진다

 

마을 안 올레에는 시곗바늘 멈춰 있다

온몸에 화상 입은 후박나무 늙은 둥치가

곰배팔 가지를 벌려 옛 상처를 보듬는 길

 

곶자왈 용암굴이 연기 속에 무너지고

별빛마저 소스라치던 그 새벽 그 총소리

나이테 헛바퀴에도 정낭을 걸이야 했다

 

기나긴 겨울 지나 새살 돋는 나목의 시간

숯등걸 덴 가슴에 봄을 새로 들이려는

뼈저린 나무의 생이 핏빛 놀을 털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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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에 타버린 나무라는 뜻의 제주도 토박이말. 제주 43 당시 군경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다 기적적으로 되살아난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에 있는 나무.

 

 


 

사라오름

 

 

성판악 삼나무 숲에

향불처럼 피는 안개

방부목 계단에 널린 낙엽을 비질하며

바람은 억센 손길로

내 무릎을 꺾는다

 

마른 떨켜 샅을 뚫고

갓 눈 뜬 어린 가지

빛바랜 사초史草 향해 궐기하듯 일떠설 때

까마귀, 오름 까마귀

목구멍이 뜨겁다

 

수천수만 울음들을

가둬 놓은 저 백록담

언제쯤 이 봉분 앞에 폭포수를 쏟아낼까

그날 그 진달래 꽃빛

사월 하늘 붉히는데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