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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2)

by 김창집1 2024. 8. 27.

 

 

손안의 양파

 

 

쉽게 한 행동에 대해 채근해 물을 때

망에 넣어둔 양파를 꺼내

손안에 꽉 찬 양파의 껍질을 벗긴다

매운바람이 코끝으로 불어와

느닷없이 굽은 척추를 자극할 때

탱탱한 하루는 눈물로 푸석해진다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 몇 년 전

바라던 일들이

잠자리 날개같이 바스러지는

한낱 껍질이었다고 느낄 때

 

속이 없는 양파

안쪽으로 갈수록 겹겹이

대답하지 못한 말들이 두꺼워지고

둥글둥글 하얗게 부풀려 진다

 

안으로만 말리는 겹겹의 탄력

그 싱싱한 뿌리는 달고 매운 속살을

한 겹 한 겹 포옹의 방식으로

둥근 달 하나 띄운다

 

내 손안의 양파,

껍질을 벗길 때

속으로 말아 넣은 촉촉한 이력이

결마다 매끈해지는 나이테

 

 


 

걸어가는 뿌리

 

 

아가의 두 다리를 꾹꾹 눌러 펴듯이

엉긴 뿌리를 피준다

작은 화분에서 서로를 얽고 뭉쳐있던 몸

 

하늘 한번 보지 못하고

가장 낮은 바닥에서

구부리고 있던 다리를 피고 일어선다

 

넓어진 독방 안에서 옆으로, 밑으로 뻗어본다

발을 뻗는 곳이 곧 길이다

 

억압의 시간 지나 독보燭步의 자유

잘 맞는 신발 신고 걷듯이 몸이 가볍다

 

머잖아 또

이 좁은 세상이 갑갑해지겠지만

구부린 발을 아래로 펴고 설 수만 있다면

허공에 함부로 발 들이밀지 않는다는

뿌리의 근본을 지길 수 있다

하늘 위로 솟은 곧은 줄기

 

초록이든 연두든

받치고 있는 뿌리가 있어야

뻗어갈 테니까

 

 


 

흰강

 

 

강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닫았다

그 위에 눈이 내려 무덤처럼 덮어버렸다

찡하고 몸을 떨며

강이 울었다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냇물이었을 때

얕은 속을 다 내보인 채

무심한 물풀들 간질이며 웃었고

작은 돌이며 송사리 떼랑 장난치며 까불대었다

 

팔다리가 죽죽 길어질 무렵

보폭이 커지면서 차츰

가벼운 몸짓을 멈추었고

서서히 시간을 돌아가는 여유를 챙겼다

함께 묻어가는 더 큰 물고기와

작은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돌이

어디서 무엇이 될까 궁금해졌다

소용돌이치며 거친 물음을 묻기도 했다

 

점차 몸이 커지자 무거운 것들은 내려놓았다

제 몸만으로도 힘이 벅차

보이는 것들은 감추고

흐름을 달래며 물살을 어루만졌다

 

이젠 속수무책으로 떠밀려가며

이 겨울을 견뎌야 한다

 

결기가 풀리고 봄이 온다 해도

생은 밑으로 흘러 더 깊어지고

되돌아 그 물소리는 듣지 못한다

 

 


 

나무는 울지 않았다

 

 

나무의 가지가 뭉텅 잘렸다

몸통의 반이 사라졌다

그래도 나무는 울지 않았다

 

내가 아파서 울었다

이제 바람이 불어도 너에게 손을 흔들지 못하고

불 켜진 창을 들여다볼 수 없다

가지를 뻗어 그림자로도 쓰다듬을 수 없으니

가질 수 없는 텅 빈 하늘에 마음을 세워두고

바람이 쌓은 탑처럼 서 있다

 

나무가 무성한 잎으로 시야를 가릴 때보다

캄캄한 바닥에 내려서서

허공에 기대어 바라보는 그리움이 더 크다

새들이 날아오르지 않고 달도 별도 걸리지 않아

풍경을 그리지 못한다

 

겨울눈이 달린 가지 하나 없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서서

근근이 이 계절을 건너고 있다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울 수 없어 안으로 삼키는 울음이 더 깊다

 

언젠가 몸 안에서

새순이 움터 자랄 그때까지

네가 울지 않으면 얼음 속

나도

응당 울지 않을 것이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서정시학, 2024)에서

                                 *사진 : '나무를 읽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