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안의 양파
쉽게 한 행동에 대해 채근해 물을 때
망에 넣어둔 양파를 꺼내
손안에 꽉 찬 양파의 껍질을 벗긴다
매운바람이 코끝으로 불어와
느닷없이 굽은 척추를 자극할 때
탱탱한 하루는 눈물로 푸석해진다
오늘 아니면 내일, 아니 몇 년 전
바라던 일들이
잠자리 날개같이 바스러지는
한낱 껍질이었다고 느낄 때
속이 없는 양파
안쪽으로 갈수록 겹겹이
대답하지 못한 말들이 두꺼워지고
둥글둥글 하얗게 부풀려 진다
안으로만 말리는 겹겹의 탄력
그 싱싱한 뿌리는 달고 매운 속살을
한 겹 한 겹 포옹의 방식으로
둥근 달 하나 띄운다
내 손안의 양파,
껍질을 벗길 때
속으로 말아 넣은 촉촉한 이력이
결마다 매끈해지는 나이테
♧ 걸어가는 뿌리
아가의 두 다리를 꾹꾹 눌러 펴듯이
엉긴 뿌리를 피준다
작은 화분에서 서로를 얽고 뭉쳐있던 몸
하늘 한번 보지 못하고
가장 낮은 바닥에서
구부리고 있던 다리를 피고 일어선다
넓어진 독방 안에서 옆으로, 밑으로 뻗어본다
발을 뻗는 곳이 곧 길이다
억압의 시간 지나 독보燭步의 자유
잘 맞는 신발 신고 걷듯이 몸이 가볍다
머잖아 또
이 좁은 세상이 갑갑해지겠지만
구부린 발을 아래로 펴고 설 수만 있다면
허공에 함부로 발 들이밀지 않는다는
뿌리의 근본을 지길 수 있다
하늘 위로 솟은 곧은 줄기
초록이든 연두든
받치고 있는 뿌리가 있어야
뻗어갈 테니까
♧ 흰강
강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닫았다
그 위에 눈이 내려 무덤처럼 덮어버렸다
찡하고 몸을 떨며
강이 울었다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냇물이었을 때
얕은 속을 다 내보인 채
무심한 물풀들 간질이며 웃었고
작은 돌이며 송사리 떼랑 장난치며 까불대었다
팔다리가 죽죽 길어질 무렵
보폭이 커지면서 차츰
가벼운 몸짓을 멈추었고
서서히 시간을 돌아가는 여유를 챙겼다
함께 묻어가는 더 큰 물고기와
작은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돌이
어디서 무엇이 될까 궁금해졌다
소용돌이치며 거친 물음을 묻기도 했다
점차 몸이 커지자 무거운 것들은 내려놓았다
제 몸만으로도 힘이 벅차
보이는 것들은 감추고
흐름을 달래며 물살을 어루만졌다
이젠 속수무책으로 떠밀려가며
이 겨울을 견뎌야 한다
결기가 풀리고 봄이 온다 해도
생은 밑으로 흘러 더 깊어지고
되돌아 그 물소리는 듣지 못한다
♧ 나무는 울지 않았다
나무의 가지가 뭉텅 잘렸다
몸통의 반이 사라졌다
그래도 나무는 울지 않았다
내가 아파서 울었다
이제 바람이 불어도 너에게 손을 흔들지 못하고
불 켜진 창을 들여다볼 수 없다
가지를 뻗어 그림자로도 쓰다듬을 수 없으니
가질 수 없는 텅 빈 하늘에 마음을 세워두고
바람이 쌓은 탑처럼 서 있다
나무가 무성한 잎으로 시야를 가릴 때보다
캄캄한 바닥에 내려서서
허공에 기대어 바라보는 그리움이 더 크다
새들이 날아오르지 않고 달도 별도 걸리지 않아
풍경을 그리지 못한다
겨울눈이 달린 가지 하나 없이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서서
근근이 이 계절을 건너고 있다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울 수 없어 안으로 삼키는 울음이 더 깊다
언젠가 몸 안에서
새순이 움터 자랄 그때까지
네가 울지 않으면 얼음 속
나도
응당 울지 않을 것이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 (서정시학, 2024)에서
*사진 : '나무를 읽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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