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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이정은 시집 '평범한 세계'의 시(3)

by 김창집1 2023. 10. 19.

 

 

떨어지는 것에 대하여

 

 

  섹스하다가 땀방울 하나 떨어졌을까요 콘크리트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높은 천장은 내려앉았고요 방이 점점 좁아지는 거예요

 

  꽉 끼는 코르셋을 입은 듯했어요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요 숨은 느리고 더뎠지요 텔레비전 속에 못난이 삼형제 인형이 나를 보고 웃고요 걷지 못했던 앉은뱅이 남자아이가 성큼 다가왔어요

 

  하얀 속옷이 옷걸이에 걸린 채 문 앞에서 흔들거렸지요 벽에 걸린 액자는 좌우로 움직여요 떨어져 산산조각 깨질 거야 파편은 너의 온몸에 박히겠지, 누군가 말해요

 

  나신의 임산부예요 검붉은 땀이 흘렀을까요 돌아가신 엄마가 나를 당겨주었어요 나는 이제 살았을까요

 

 

 

화분

 

 

  나에게 물어보세요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나니까요

 

  화분의 꽃나무 때문예요 검은 털로 수북했어요 각진 어깨는 무거웠고요 뜨거운 뭔가가 흘러내렸지요 비릿한 러닝을 뒤집어 입은 채 쇠 깎는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어요 밤새 쌓인 눈 때문에 발자국은 도망갈 수 없었죠 내 몸은 벼랑 끝에 매달린 고드름 같았지요 출구를 찾아야 했어요

 

  가지는 부러졌고 껍질은 벗겨졌어요 신음이 들려오는 이명에 시달리던 나는 화분을 든 채 아파트 단지에서 쓰레기처리장까지 헤매 다녔죠 지릿한 바다 냄새가 생생하게 기억나요 화분을 먼 바다 떠나는 배의 화물칸에 실었어요 흉곽을 짓누르던 소리 나를 버리지 마세요 열리지 않는 문 밖에서 꽃이 떨어진다면 심장 뛰는 방향으로 묻히겠죠 모두들 잊었겠지만 난 잊지 않았어요

 

  지금 내 앞에서 심장 뛰는 소리로 엄마, 하고 부르네요 누구세요? 화분을 버렸을 뿐이에요 화분을 실은 배는 기우뚱거리며 바다를 건너요 화분을 들었던 손엔 이제 검버섯이 피었어요 나에게 물어봐요 화분에 대해서요 선명하게 기억나니까요

 

 

 

환청의 감각

 

 

어느 한 곳이 함몰된 요염함이 홀로 산다

아무도 도착할 수 없는 경계의 세계

 

늦으면 상담이 어려울 수도 있어요

붉은 실핏줄 위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검사지는 반대 방향으로 이리저리 흘러 다녔다

내가 왜 아버지와 성교하는지 아세요?

타인들은 잃어버린 겨울밤 한 짝이란 의혹을 가져요

겨울밤은 성기 잘린 악마의 꿈 아닌가요

의사 선생님은 왜 자꾸 뒤돌아보죠

나와 당신과의 대화를 정은이가 들을까봐, 이어폰을 귀에 꽂았어요

겨울밤 같은 시 부스러기가 정은을 핥아요

카터 칼이 또각또각 부러져 나가요?

 

이정은님 다음 주도 내원하세요 혼자 오세요

겨울밤 내린 어깨가 얘야, 사랑한다

 

 

             * 시인동네 시인선 211, 이정은 시집 평범한 세계(시인동네,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