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드러운 일격 – 김광렬
원수를 사랑하라니?
원수는 갚는 것이라는
오래된 고정관념을
날카롭게 찌르는
그 부드러운 일격,
나는 원수를 도저히
사랑하지 못하고
숱한 날들을
풀잎처럼 흔들리며
풀잎처럼 흔들리며……
♧ 흰머리독수리 – 김규중
장태코라 불리우는 노로오름 분화구
4․3유적지조사에서
미 육군 군복단추를 발굴했다
유격대의 주력부대가 주둔했던,
토벌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천고지 오름
탄두, 탄피, 탄환 클립, 대검집 들은
여러 번 발굴되었는데
처음으로 나왔다
독수리 문양의 금속단추
미 육군 군복 오버코트의 단추
의견이 분분했다
낭만적인 해석부터 과학적인 분석까지
전투 종료 후 미군장교가 확인하기 위해
장태코를 찾았다가
만 훗날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기 위해서
일부러 남긴 것이다
아니다, 미군이 전투요원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한 것이다
아니다, 주변에서 단추가 더 이상 발굴되지 않아
전사한 것은 아니고 격렬한 전투 속에서
단추 하나만 떨어진 것이다 등등
노로오름 전투 현장에서 발굴된
천고지 찬바람 흰머리독수리야
너의 정체는?
♧ 나무도마 – 김미경
마르고 닳도록
두들겨 맞으면서도
베이고 파이고 데이고…
제손으로 고스란히 받으면서
쓰든 달든 피든 죽음이든
아니 그 무엇이든 맛을 보면서
좋든 싫든 어떤 식으로든
상대를 부드럽게 대하면서
낮은 몸 되었다.
♧ 허튼소리 한마디 – 김병택
참나무 줄기처럼 질긴 신경이
허튼소리 한 마디에 부서진 뒤
옛날의 추억처럼, 공중으로 뻗치는
도시의 회색 쓰레기를 깨끗이 치웠다
조금씩 내리는 비에 온통 젖은 채
대지의 노래를 실어 나르는 새들은
울창한 나무들이 가득한 운동장에서도
방향을 잃은 채 여러 번 퍼덕거렸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했지만
한동안은 분명히 쉽게 사라지지 않을
허튼소리 한 마디가 좁은 반경의
주위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맴도는 날
평소보다 세 배쯤 목일 말랐다
♧ 깃털 하나 – 김순선
국립 현충원 4․3길 따라가는 길목에
깃털 하나 떨어져 있다
어떤 새의 깃털인지 알 수 없지만
날아가야 할 길이 까마득하여
좀 더 가벼워지고 싶어서
깃털 하나 덜어냈나
하얀색과 검은색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어떤 새의 깃털
무심히 걸어가는
침묵하는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펜촉 같은
새의 마음
졸졸 따라온다
*계간 제주작가 2023년 가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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