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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1)

by 김창집1 2023. 10. 20.

 

 

부드러운 일격 김광렬

 

 

원수를 사랑하라니?

원수는 갚는 것이라는

오래된 고정관념을

날카롭게 찌르는

그 부드러운 일격,

나는 원수를 도저히

사랑하지 못하고

숱한 날들을

풀잎처럼 흔들리며

풀잎처럼 흔들리며……

 

 

 

 

흰머리독수리 김규중

 

 

장태코라 불리우는 노로오름 분화구

43유적지조사에서

미 육군 군복단추를 발굴했다

 

유격대의 주력부대가 주둔했던,

토벌대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천고지 오름

탄두, 탄피, 탄환 클립, 대검집 들은

여러 번 발굴되었는데

처음으로 나왔다

독수리 문양의 금속단추

미 육군 군복 오버코트의 단추

 

의견이 분분했다

낭만적인 해석부터 과학적인 분석까지

 

전투 종료 후 미군장교가 확인하기 위해

장태코를 찾았다가

만 훗날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기 위해서

일부러 남긴 것이다

아니다, 미군이 전투요원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한 것이다

아니다, 주변에서 단추가 더 이상 발굴되지 않아

전사한 것은 아니고 격렬한 전투 속에서

단추 하나만 떨어진 것이다 등등

 

노로오름 전투 현장에서 발굴된

천고지 찬바람 흰머리독수리야

너의 정체는?

 

 

 

 

나무도마 김미경

 

 

마르고 닳도록

두들겨 맞으면서도

 

베이고 파이고 데이고

제손으로 고스란히 받으면서

 

쓰든 달든 피든 죽음이든

아니 그 무엇이든 맛을 보면서

 

좋든 싫든 어떤 식으로든

상대를 부드럽게 대하면서

낮은 몸 되었다.

 

 

 

 

허튼소리 한마디 김병택

 

 

참나무 줄기처럼 질긴 신경이

허튼소리 한 마디에 부서진 뒤

 

옛날의 추억처럼, 공중으로 뻗치는

도시의 회색 쓰레기를 깨끗이 치웠다

조금씩 내리는 비에 온통 젖은 채

 

대지의 노래를 실어 나르는 새들은

울창한 나무들이 가득한 운동장에서도

방향을 잃은 채 여러 번 퍼덕거렸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했지만

한동안은 분명히 쉽게 사라지지 않을

허튼소리 한 마디가 좁은 반경의

주위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맴도는 날

 

평소보다 세 배쯤 목일 말랐다

 

 

 

 

깃털 하나 김순선

 

 

국립 현충원 43길 따라가는 길목에

깃털 하나 떨어져 있다

어떤 새의 깃털인지 알 수 없지만

날아가야 할 길이 까마득하여

좀 더 가벼워지고 싶어서

깃털 하나 덜어냈나

하얀색과 검은색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어떤 새의 깃털

무심히 걸어가는

침묵하는 사람들에게

날카로운 펜촉 같은

새의 마음

졸졸 따라온다

 

 

                     *계간 제주작가 2023년 가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