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수기곶에 들르다 – 김순선
수묵화인 날씨에
연잎 같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흔들리는 연잎 사이로
핼쑥한 해
숨바꼭질하는 한수기곶
강도 센 돌부리의 지압을 받으며
무장대 발자취 따라 걸어본다
숲에는 아기단풍 곱게 내려와
별처럼 길 인도하는데
아직도 그곳엔 그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듯
서슬 푸른 탱자나무 가시가
불쑥불쑥 마을 걸어오고
사람 발길이 그리웠던 도깨비바늘도
옷 속으로 파고든다
오늘은 이 궤에서
내일은 저 궤에서
한데 잠을 자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했던 사람들
한 곳에 오래 머물지도 못하여
이곳저곳
은신처를 찾아 헤매던 무리들
그들의 숨소리가 배어 있던 궤에는
박쥐들이 기거 중이고
무장대 함성이 들리던 훈련장엔
두 마리 말이
오토바이 말뚝에 묶여
달리기를 포기한 채 몰방 돌 듯
제자리걸음 한다
♧ 그렇구나, 문상길 – 김현미
바람 부는 섬에서
사람으로 산다는 건
기어이 바람이 되는 것
바람의 눈이 되는 것
스스로
도려낸 심장
한 발
총성이었네
♧ 술 한 잔 - 김영란
더듬어 찾아간 날 벌써 날은 저물어
핏발이 스며든 땅에 이슬로 졌을지 모를
아직도 헤매고 있을 그대 이름 불렀지
안동 이식골 남평 문씨 종갓집 막내아들
인간의 법정에선 대한민국 첫 사형수
하늘의 법정에서는
무죄판결 받았는지
‘수색 동방 5리’
‘이름 없는 붉은 산기슭’
오래 전 신문기사 기대어 찾아간
경기도 망월산 뒤편 수작골은 아직 붉어
조국과 동포를 부르짖으며 죽어간
스물셋 그 영혼이 아직도 헤맬 것 같아
향 살라 무릎 꿇고서 올려 드린 술 한 잔
♧ 툰드라 – 김영숙
저어기 돌담 위에
새순 돋아도
툰드라
김시인 배롱나무 꽃
바알가니 피는데
툰드라
송령골 비크레기엔
아직도
툰드라
툰드라
♧ 빙세기를 아시나요 – 김정숙
소리를 죽인 꽃잎이 방긋 벌어지는 동안
눈꼬리 입 꼬리가 마주 길어지는 동안
그 잠깐 부드러운 순도에 얼음벽이 녹는다
일천구백사십팔년 사월이십팔일 한수곶 살얼음 밤을 걸어내려 온 김달삼과 먼 생각 돌고 돌아온 김익렬이 만나서 세기의 담판을 짓는 구억국민학교에서도 여린 빙세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미소가 방긋방긋 터지는 것처럼 빙세기도 빙싹 빙싹 얼음에 싹을 낸다 빙싹도 자란다는 걸 섬사람들은 알았지만,
그렇게 그런 세기 살아낸 사람들이
너나없이 빙세기를 가지고 가 버렸다
아들 딸 재산 다 두고 친절한 미소도 두고
몇 세기 더 살아야 빙세기 돌아오나요
미소는 대놓고 돈이 되기도 하는데
골동품 빙세기라면 한 세상 살 것도 같은데
*제주작가회의 엮음 『서러울수록 그리울수록 붉어지는』(한그루,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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