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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제주 4.3 75주년 추념시집 '서러울수록 그리울수록 붉어지는'(4)

by 김창집1 2023. 10. 18.

 

한수기곶에 들르다 김순선

 

수묵화인 날씨에

연잎 같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흔들리는 연잎 사이로

핼쑥한 해

숨바꼭질하는 한수기곶

강도 센 돌부리의 지압을 받으며

무장대 발자취 따라 걸어본다

 

숲에는 아기단풍 곱게 내려와

별처럼 길 인도하는데

아직도 그곳엔 그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듯

서슬 푸른 탱자나무 가시가

불쑥불쑥 마을 걸어오고

사람 발길이 그리웠던 도깨비바늘도

옷 속으로 파고든다

 

오늘은 이 궤에서

내일은 저 궤에서

한데 잠을 자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했던 사람들

한 곳에 오래 머물지도 못하여

이곳저곳

은신처를 찾아 헤매던 무리들

그들의 숨소리가 배어 있던 궤에는

박쥐들이 기거 중이고

무장대 함성이 들리던 훈련장엔

두 마리 말이

오토바이 말뚝에 묶여

달리기를 포기한 채 몰방 돌 듯

제자리걸음 한다

 

 

 

 

그렇구나, 문상길 김현미

 

 

바람 부는 섬에서

 

사람으로 산다는 건

 

기어이 바람이 되는 것

 

바람의 눈이 되는 것

 

스스로

 

도려낸 심장

 

한 발

 

총성이었네

 

 

 

 

술 한 잔 - 김영란

 

 

더듬어 찾아간 날 벌써 날은 저물어

핏발이 스며든 땅에 이슬로 졌을지 모를

아직도 헤매고 있을 그대 이름 불렀지

 

안동 이식골 남평 문씨 종갓집 막내아들

인간의 법정에선 대한민국 첫 사형수

하늘의 법정에서는

무죄판결 받았는지

 

수색 동방 5

이름 없는 붉은 산기슭

오래 전 신문기사 기대어 찾아간

경기도 망월산 뒤편 수작골은 아직 붉어

 

조국과 동포를 부르짖으며 죽어간

스물셋 그 영혼이 아직도 헤맬 것 같아

향 살라 무릎 꿇고서 올려 드린 술 한 잔

 

 

 

 

툰드라 김영숙

 

 

저어기 돌담 위에

새순 돋아도

툰드라

 

김시인 배롱나무 꽃

바알가니 피는데

툰드라

 

송령골 비크레기엔

아직도

툰드라

툰드라

 

 

 

 

빙세기를 아시나요 김정숙

 

 

  소리를 죽인 꽃잎이 방긋 벌어지는 동안

  눈꼬리 입 꼬리가 마주 길어지는 동안

  그 잠깐 부드러운 순도에 얼음벽이 녹는다

 

  일천구백사십팔년 사월이십팔일 한수곶 살얼음 밤을 걸어내려 온 김달삼과 먼 생각 돌고 돌아온 김익렬이 만나서 세기의 담판을 짓는 구억국민학교에서도 여린 빙세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미소가 방긋방긋 터지는 것처럼 빙세기도 빙싹 빙싹 얼음에 싹을 낸다 빙싹도 자란다는 걸 섬사람들은 알았지만,

 

  그렇게 그런 세기 살아낸 사람들이

  너나없이 빙세기를 가지고 가 버렸다

  아들 딸 재산 다 두고 친절한 미소도 두고

 

  몇 세기 더 살아야 빙세기 돌아오나요

  미소는 대놓고 돈이 되기도 하는데

  골동품 빙세기라면 한 세상 살 것도 같은데

 

 

    *제주작가회의 엮음 서러울수록 그리울수록 붉어지는(한그루,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