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떨어지는 것에 대하여
섹스하다가 땀방울 하나 떨어졌을까요 콘크리트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높은 천장은 내려앉았고요 방이 점점 좁아지는 거예요
꽉 끼는 코르셋을 입은 듯했어요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요 숨은 느리고 더뎠지요 텔레비전 속에 못난이 삼형제 인형이 나를 보고 웃고요 걷지 못했던 앉은뱅이 남자아이가 성큼 다가왔어요
하얀 속옷이 옷걸이에 걸린 채 문 앞에서 흔들거렸지요 벽에 걸린 액자는 좌우로 움직여요 떨어져 산산조각 깨질 거야 파편은 너의 온몸에 박히겠지, 누군가 말해요
나신의 임산부예요 검붉은 땀이 흘렀을까요 돌아가신 엄마가 나를 당겨주었어요 나는 이제 살았을까요
♧ 화분
나에게 물어보세요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나니까요
화분의 꽃나무 때문예요 검은 털로 수북했어요 각진 어깨는 무거웠고요 뜨거운 뭔가가 흘러내렸지요 비릿한 러닝을 뒤집어 입은 채 쇠 깎는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어요 밤새 쌓인 눈 때문에 발자국은 도망갈 수 없었죠 내 몸은 벼랑 끝에 매달린 고드름 같았지요 출구를 찾아야 했어요
가지는 부러졌고 껍질은 벗겨졌어요 신음이 들려오는 이명에 시달리던 나는 화분을 든 채 아파트 단지에서 쓰레기처리장까지 헤매 다녔죠 지릿한 바다 냄새가 생생하게 기억나요 화분을 먼 바다 떠나는 배의 화물칸에 실었어요 흉곽을 짓누르던 소리 나를 버리지 마세요 열리지 않는 문 밖에서 꽃이 떨어진다면 심장 뛰는 방향으로 묻히겠죠 모두들 잊었겠지만 난 잊지 않았어요
지금 내 앞에서 심장 뛰는 소리로 엄마, 하고 부르네요 누구세요? 화분을 버렸을 뿐이에요 화분을 실은 배는 기우뚱거리며 바다를 건너요 화분을 들었던 손엔 이제 검버섯이 피었어요 나에게 물어봐요 화분에 대해서요 선명하게 기억나니까요
♧ 환청의 감각
어느 한 곳이 함몰된 요염함이 홀로 산다
아무도 도착할 수 없는 경계의 세계
늦으면 상담이 어려울 수도 있어요
붉은 실핏줄 위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검사지는 반대 방향으로 이리저리 흘러 다녔다
내가 왜 아버지와 성교하는지 아세요?
타인들은 잃어버린 겨울밤 한 짝이란 의혹을 가져요
겨울밤은 성기 잘린 악마의 꿈 아닌가요
의사 선생님은 왜 자꾸 뒤돌아보죠
나와 당신과의 대화를 정은이가 들을까봐, 이어폰을 귀에 꽂았어요
겨울밤 같은 시 부스러기가 정은을 핥아요
카터 칼이 또각또각 부러져 나가요?
이정은님 다음 주도 내원하세요 혼자 오세요
겨울밤 내린 어깨가 얘야, 사랑한다
* 시인동네 시인선 211, 이정은 시집 『평범한 세계』 (시인동네,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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