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취濫吹 - 김석규
한비자韓非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우芋(큰 상황)를 좋아하여
악사 삼백 명을 동원하여 불게 했는데
처사 남곽南郭은 불 줄도 모르면서
악사들 틈에 끼어 부는 체하며 악사 벼슬을 하였다
그러나 다음 왕인 민왕湣王이
악사를 한 사람씩 불러서 불게 하자
남곽은 그만 도망을 가버렸다는데
이는 함부로 피리를 분다는 뜻으로
무능하면서도 재능이 있는 체함을 일컫는다.
♧ 발바닥 - 홍해리
한 짐의 때를 지고
한마디 불평,
불만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묵묵히 가고 있는
한평생 성자.
♧ 길 – 도경희
검은 물 짙어진 치마 스란거리며
초승달 실눈 뜨면
밤이슬 마시며 풀벌레들
찬 시를 읊네
미소한 입술로
수 삭은 음향에
가슴 뜯긴 너
칼집처럼 무거운 운명 품고
삶의 길목마다
푸른 길 열어 사는가
달빛 젖어 몸맵시 은은한 신작로
허기 잘박거리는
숲실로 가는 길
새벽이 천둥처럼 밝아오면
그 길이 혼자 남아 댕기처럼 흘러간다
♧ 밤을 지나 새벽으로 - 강동수
어둠은 아침을 향해 달리기 좋은 시간
나는 그 새벽을 달고
불면의 밤들을 건넌다.
아직도 참회치 못한 미숙한 말들과
내가 던진 농담이 화살이 되어
어느 과녁으로 날아가 박혔는지
아픈 가슴이 울고 있을 이 여명의 시간
부끄럽다
한없이 작은 입술이여
용서의 기도도 올리지 못하고
새벽이 지나가고 있다
아침 해가 눈뜨기 전 문 앞에 던져진 소식들
아주 먼 곳에서 무너지고 금이 간 가슴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고
날마다 얼굴을 나타내는 사람은
지난 시간들의 변명으로
멀리 달아나고 있다
어느 한쪽 지면에 주석을 달고
써내려간 시편을 조용히 읽어 내리면
창밖으로 아무도 용서하지 않은
어둠이 달아나고 있다
♧ 갈래머리 연가 – 윤순호
금잔디가 스르르 눕는 운동장 언저리
활활 타던 칸나가 열기를 추스르는 초저녁
책갈피 위에 얌전히 접힌 손수건보다
갈래머리 흰 칼라 교복이 얼마나 고왔던지
아! 어스름 달빛 속 아롱진 꽃망울이었던
갸름한 짝눈 웃음은 스러진 지 오래
도란도란 두 설렘을 핏빛 향으로 시샘하던
그 모란 그곳에 다붓이 피었을까
꿈을 좇던 까까머리는 이다지 속절없는데
운동화 코가 앙증맞던 소녀야 저만치 꽃길이겠지
지금도 하고많은 모란은 피고 지는데
*계간 『우리詩』 2023년 10월호(통권424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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