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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0월호의 시(4)

by 김창집1 2023. 10. 22.

 

남취濫吹 - 김석규

 

 

한비자韓非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선왕宣王이 우(큰 상황)를 좋아하여

악사 삼백 명을 동원하여 불게 했는데

처사 남곽南郭은 불 줄도 모르면서

악사들 틈에 끼어 부는 체하며 악사 벼슬을 하였다

그러나 다음 왕인 민왕湣王

악사를 한 사람씩 불러서 불게 하자

남곽은 그만 도망을 가버렸다는데

이는 함부로 피리를 분다는 뜻으로

무능하면서도 재능이 있는 체함을 일컫는다.

 

 

 

발바닥 - 홍해리

 

 

한 짐의 때를 지고

한마디 불평,

불만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묵묵히 가고 있는

한평생 성자.

 

 

 

 

도경희

 

 

검은 물 짙어진 치마 스란거리며

초승달 실눈 뜨면

밤이슬 마시며 풀벌레들

찬 시를 읊네

미소한 입술로

 

수 삭은 음향에

가슴 뜯긴 너

칼집처럼 무거운 운명 품고

삶의 길목마다

푸른 길 열어 사는가

 

달빛 젖어 몸맵시 은은한 신작로

허기 잘박거리는

숲실로 가는 길

 

새벽이 천둥처럼 밝아오면

그 길이 혼자 남아 댕기처럼 흘러간다

 

 

 

 

밤을 지나 새벽으로 - 강동수

 

 

어둠은 아침을 향해 달리기 좋은 시간

나는 그 새벽을 달고

불면의 밤들을 건넌다.

아직도 참회치 못한 미숙한 말들과

내가 던진 농담이 화살이 되어

어느 과녁으로 날아가 박혔는지

아픈 가슴이 울고 있을 이 여명의 시간

 

부끄럽다

한없이 작은 입술이여

용서의 기도도 올리지 못하고

새벽이 지나가고 있다

 

아침 해가 눈뜨기 전 문 앞에 던져진 소식들

아주 먼 곳에서 무너지고 금이 간 가슴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고

날마다 얼굴을 나타내는 사람은

지난 시간들의 변명으로

멀리 달아나고 있다

어느 한쪽 지면에 주석을 달고

써내려간 시편을 조용히 읽어 내리면

창밖으로 아무도 용서하지 않은

어둠이 달아나고 있다

 

 

 

 

갈래머리 연가 윤순호

 

 

금잔디가 스르르 눕는 운동장 언저리

활활 타던 칸나가 열기를 추스르는 초저녁

책갈피 위에 얌전히 접힌 손수건보다

갈래머리 흰 칼라 교복이 얼마나 고왔던지

! 어스름 달빛 속 아롱진 꽃망울이었던

갸름한 짝눈 웃음은 스러진 지 오래

도란도란 두 설렘을 핏빛 향으로 시샘하던

그 모란 그곳에 다붓이 피었을까

꿈을 좇던 까까머리는 이다지 속절없는데

운동화 코가 앙증맞던 소녀야 저만치 꽃길이겠지

지금도 하고많은 모란은 피고 지는데

 

 

                *계간 우리202310월호(통권4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