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비 속에서 I
네 넋이 어디쯤 스러져 오는 것일까
등을 맞대고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캄캄한 너의 하늘
검은 개가
가로등 빛을 핥듯
아픈 우리의 속말은 슬픔의 강을 건넌다
금세라도 네 모습 뛰쳐나올 듯
아스라지는
목마름
열아홉 고개를 넘던 날밤
그리도 곱게 웃더니
아아, 비 내리는 이 밤
나의 하늘엔 마른번개가 치고 있다
♧ 밤비 속에서 II
어디로 갈까
가등(街燈) 빛 젖어 내리는 거리
수천만 개의 낯선 얼굴들이
나의 옆을 스쳐 지나는가
어디로 갈까
바다 기슭을 돌아와
발밑에 밀리는
나목(裸木)의 그림자
바람은 네 머리카락을 흔들고
내 머리카락도 흔든다
하늘 한 자락 살아있는 번개
어둠을 쪼개듯
내 넋을 쪼개고
빗물이 고여 들어
아아, 이리도 허전한 목마름
♧ 밤비 속에서 Ⅲ
하늘이 다 문드러지면
바람아,
어느 동구(洞口) 밖
버려진 머리카락 흔들까
♧ 소녀에게
마구 빗속을 해매었댔지
더러는 잊힘 직한 네 얼굴이
이 조용한 밤
일제히 일어서서
나무토막 같은 가슴을 깎는다
잊는다는 것이
유언(遺言)처럼이나 힘든 것이러뇨
자꾸만 항구로 젖어 밀려드는
서귀포 불빛
그리하여
나의 옷깃에 슬픔은 나부끼고
두 손 휘저으면
잡히는 건
빈 가슴만큼의 허공
소녀야
떠나서 먼 소녀야
아픔을 씻기 위해
우린 마구 빗속을 해매었댔지
이제 겨울이 오는 길목에 서서
나목(裸木)처럼
얼룩진 잎사귀들을 떨쳐버리고
첫눈처럼 찾아올 너를 기두린다
♧ 밀감
春
한라에 붙는 불꽃
꽃 선녀의 흰 가슴인가
그 향기 짙은 골에
초가집 모여들제
눈이 먼
청비바리 머리에
댕기인 양 나는 나비
夏
소낙비 오고 나자
색깔 더욱 파랗고나
서귀포 마을마다
울리는 풍경소리
아득히 멀어지다가
귓전을 때리다가
秋
구름에 숨는 달보다
더 수줍은 홍색시가
사랑에 몸이 앓듯
옷깃 끝에 갸웃갸웃
冬
황금귤 빛깔로
삼동(三冬)에도 훈훈하네
청노루 한 마리가
깊은 밤 산길 내려
훠언한
이 광경 보고
천국인가 하는구료
* 오승철 유고 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 (다층,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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