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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의 시(8)

by 김창집1 2024. 9. 11.

 

 

노각

 

 

한때는 말이야

금빛 두른 노장들

 

푸른 날

물러지며 잘 익은

말씀만 남아

 

한 생의

쓰고도 단맛

소주잔이 넘친다

 

 


 

아직도 저기,

 

 

순아, 자야, 부르던

그 이름들 어디 가고

 

아직도 저기,

과물 빨래터 맨 뒤쪽엔

밀물과 썰물 사이로 노란 똥 동동 뜬다

 

서툴게 비튼 기저귀

담벼락에 펄럭이고

 

물 봉봉 들어와 경계조차 지워진

멱감다 물허벅 지고 달리던 발자국들

 

뉘엿뉘엿 수평선에

정적만 저리 남아

 

그리운 이름들 하나둘 건져 올리면

빨래터 방망이 소리 옥타브를 타고 있다

 

 


 

팔순의 마당

 

 

팔순의 넓은 마당 깻단들 가득하다

까맣게 그은 얼굴, 땀방울을 훔치며

팔월의 노란 냄비에

참깨 톡톡 튀고 있다

 

깨알 같은 염원을 명석 위에 가득 널면

엊저녁 아픈 다리가 어느새 말짱해져

올해만 올해만 하며 깻단을 털고 있는

 

마음은 늘 그렇게 늙지도 않는 건지

잔잔한 내리사랑 푸르른 심줄 같은

노모의 굽은 등 뒤에

풍선처럼 부푼 하루

 

 


 

영주 기름집

 

 

어디서 풍겨올까 고소함 덤으로 얹고

한물간 영주기름집 반짝 세일하듯

명절 전 도심 한 귀퉁이

줄을 잇는 사람들

 

봄부터 여름가지 깨알 같은 땅심을 깨워

신토불이 고집하며 땀방울을 적시던

할머니 검버섯 핀 얼굴

참깨꽃이 피었다

 

일 년을 마무리 하듯 한 병 한 병 채우면

뽀글뽀글 살아온 날 향기로나 남을까

스산한 늙은 거리에

솔솔 풍기는 삶의 진미

 

 

                       * 장영춘 시집 달그락, (한그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