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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1)와 황근

by 김창집1 2024. 9. 8.

 

 

시농詩農 - 임보

 

 

시의 농사를 시작한 지 70여 년

드디어 깨달은 것은

이젠 그만 폐농을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동안

별 쓸데없는 말들 많이 거두어 들였다

곳간에 가득 쌓여 있는

저 헛말들의 곡식

 

한 목숨의 구황 능력도 없는

저것들을

어떻게 한다?

 

버릴 데도 없어

그냥 껴안고

낑낑대고 자빠졌다

 

 


 

장맛비 예보 정봉기

 

 

청문회, 특감 극우, 극좌,

대립과 갈등으로 어지러운

유월의 마지막 주 금요일.

해병대원 순직,

세월호 참사에서 이태원 참사까지,

부모의 속은 타들고

속이 시원한 진실은 없다.

셈법에 달인들,

끝내는 묻힌다.

 

온다던 장마전선은 남해에 머문다.

장맛비는 없고 땡볕만 가득하다.

예보는 예보, 수사는 수사.

 

 


 

배냇짓 정순영

 

 

잠에서 깨어나

맑은 마음으로 얼굴을 씻고

골목을 빠져나온

몸가짐이 어른스레 단정한 어린이와 골 깊은 주름을 펴 보이는 노인들이

십자가 교회당에서

말씀을 들으며

믿음으로 낮게 엎드려 기도하며

시냇물보다 맑은 목소리로 찬송하며

주님 품에 안기어

연신 예쁜 배냇짓을 하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시려고

죽음에서 살리셨네

 

 


 

눈 오는 날의 몽상 조성례

 

 

오랜만에 눈 오는 거리에 서 본다

타이어가 밟고 지나는 자리마다 물기를 토하고

누군가 벤치를 만지면서

따뜻하냐고 묻는다

멀리서 보이는 눈 덮인 산은 외로움을 끌고 달려온다

 

나이 드니 생수 뚜껑 열기도 힘드네

서러워,

뚜껑을 살짝 누르고 따니 쉽게 따지네요

, , 컬 가래 끓는 옆집 여자의 웃음이 서글프다

 

손을 꼭 잡은

노부부가 서로를 지탱해 주며 걸어간다

그간의 잃어버린 세월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잡은 손이 미끄러지지 않게

함께 따라가는 시간들이

미끄러운 눈길을 슬적슬적 흔들어 놓는다

 

따르릉 멀리서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

뭐 해?

첫눈 오는 날의 전화는 모두 첫사랑

봄눈 녹듯 살풋해지는 마음

급브레이크 소리에 주변이 놀라

내게로 건너오는 눈 섞인 물

색깔이 어둡다

버스의 문이 열리고

짐 부리듯 사람들이 하나 둘 포개진다

 

 

 

 

큐브 인간 - 최경은

 

 

사각의 면을 돌린다

그림자가 접혀 있다

 

기울어진 모서리

문을 밀고 들어간 나의 뒷모습이 보인다

빌딩 속에 갇힌다

누군가 입구를 만들어 줘야 빠져나올 수 있다

 

서로 회전하듯

빌딩 속 빌딩이 겹쳐지고

퍼즐 속 퍼즐들이 시간을 밀고 있다

 

444큐브 공식은 쉽지만

간간마다 미궁 속이라서

나는 한 달 내내 나를 잊은 채

빌딩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허공을 민다

여백을 민다

기하학적 무늬들이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온다

모서리 근육이 되살아난다

빌딩 속 얼굴들이 서로 밀고 당긴다

엇갈린 조각들이 조각 속에 갇혀 있다

 

규격화된 얼굴들이 낯설다

 

직선에서 직선으로

곡선에서 직선으로 앞만 바라보며 달려간다

달리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머릿속 수많은 공식들이 뒤죽박죽이다

너무 많은 내 안의 내가 열리지 않는다

 

 

                  * 월간 우리9월호(통권435)에서

                              * 사진 : 황근(黃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