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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오승철 유고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의 시(11)

by 김창집1 2024. 9. 10.

 

 

밤비 속에서 I

 

 

네 넋이 어디쯤 스러져 오는 것일까

 

등을 맞대고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캄캄한 너의 하늘

검은 개가

가로등 빛을 핥듯

아픈 우리의 속말은 슬픔의 강을 건넌다

 

금세라도 네 모습 뛰쳐나올 듯

아스라지는

목마름

 

열아홉 고개를 넘던 날밤

그리도 곱게 웃더니

아아, 비 내리는 이 밤

나의 하늘엔 마른번개가 치고 있다

 

 


 

밤비 속에서 II

 

 

어디로 갈까

가등(街燈) 빛 젖어 내리는 거리

 

수천만 개의 낯선 얼굴들이

나의 옆을 스쳐 지나는가

 

어디로 갈까

바다 기슭을 돌아와

발밑에 밀리는

나목(裸木)의 그림자

 

바람은 네 머리카락을 흔들고

내 머리카락도 흔든다

 

하늘 한 자락 살아있는 번개

어둠을 쪼개듯

내 넋을 쪼개고

 

빗물이 고여 들어

아아, 이리도 허전한 목마름

 

 


 

밤비 속에서

 

 

하늘이 다 문드러지면

 

바람아,

어느 동구(洞口)

버려진 머리카락 흔들까

 

 


 

소녀에게

 

 

마구 빗속을 해매었댔지

 

더러는 잊힘 직한 네 얼굴이

이 조용한 밤

일제히 일어서서

나무토막 같은 가슴을 깎는다

 

잊는다는 것이

유언(遺言)처럼이나 힘든 것이러뇨

 

자꾸만 항구로 젖어 밀려드는

서귀포 불빛

그리하여

나의 옷깃에 슬픔은 나부끼고

 

두 손 휘저으면

잡히는 건

빈 가슴만큼의 허공

 

소녀야

떠나서 먼 소녀야

아픔을 씻기 위해

우린 마구 빗속을 해매었댔지

 

이제 겨울이 오는 길목에 서서

나목(裸木)처럼

얼룩진 잎사귀들을 떨쳐버리고

첫눈처럼 찾아올 너를 기두린다

 

 


 

밀감

 

 

한라에 붙는 불꽃

꽃 선녀의 흰 가슴인가

그 향기 짙은 골에

초가집 모여들제

눈이 먼

청비바리 머리에

댕기인 양 나는 나비

 

 

소낙비 오고 나자

색깔 더욱 파랗고나

서귀포 마을마다

울리는 풍경소리

아득히 멀어지다가

귓전을 때리다가

 

 

 

구름에 숨는 달보다

더 수줍은 홍색시가

사랑에 몸이 앓듯

옷깃 끝에 갸웃갸웃

 

 

황금귤 빛깔로

삼동(三冬)에도 훈훈하네

청노루 한 마리가

깊은 밤 산길 내려

훠언한

이 광경 보고

천국인가 하는구료

 

 

            * 오승철 유고 시집 봄날만 잘도 간다(다층,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