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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완)

by 김창집1 2024. 9. 18.

 

 

까마중

 

 

도두봉 갔다 오다

잠시 멈춘 걸음에

 

까맣게 익은 아이

날 보며 웃고 있데

 

잡힐 듯

말 듯한 시절

아련히 다가왔네

 

까마중,

얼마나 순도 높은 빛깔이었나

 

목마름 깊을수록

최대치로 끌어 모아

 

한입에

밀어 넘기면

배냇짓처럼 얹힌 단물

 

 


 

고봉밥

 

 

아들 밥 뜰 때마다

그 말씀 생각난다

사람은 밥심으로

살아가는 거라며

사발꽃*

수북이 피듯

고봉밥 떠 주셨지

 

비수로 꽂힌 말도

누르면 지나는 것

쉰다섯 혹은 여섯

내 삶의 급커브길

꾸욱꾹

눌러 담아야지

세상 실은 고봉밥

 

---

* 사발꽃 : ‘수국의 제주어.

 

 


 

부끄럽다

 

 

당산봉 아버지 산소

 

옆에서 늘 지키는

 

등 굽은 소나무에게

 

죄송하고 부끄럽다

 

간간이 찾아오는 난

 

핑계만 가득한데

 

 


 

반응의 차이

 

 

  술래의 길음으로 가만히 돌아본다

 

  노리매에 온 꽃소식에 물관이 차올라 서울 사는 딸 아들과 카톡을 주고받다가, 이모 집에 놀러 갔더니 세뱃돈을 받았다며 농담처럼 커피향처럼 툭툭 던졌다 세뱃돈 생각하니, 딸 아들에게 언제 돈다운 돈을 줘 본 적이 있던가 세뱃돈 받으면 낼름 삼키기만 했을 뿐, 이 생각 저 생각 그려놓다가 큰맘 먹고 똑같이 거금을 쏘았다 어머니, 가족끼리 왜 이러세요. 이러시면 곤란해요. 저는 직장인이잖아요세상 물정 헤아린 사회인처럼 딸은 반듯하게 사양했다 대학생 아들은 아이고, 어머니 사랑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평소에 오지 않던 하트가 날아오면서 수꽃술의 무뚝뚝한 입술도 스르르 벌리는 순간

 

  비로소 꿈길로 떠났던 사랑이 귀환했다

 

 


 

까닭 없이

 

 

어제는 하루 종일 까닭 없이 죽고팠다

세상이 까닭 없이 힘들고 우울해져

색채를 잃어버린 뒤, 투명하게 서 있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까닭 없이 살고프다

아무라도 만나서 품어주고 싶은 마음

너 있어 참 좋았다는 포용심도 생겼다

 

늙으면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도

약 먹는 시간 하나 칼같이 지켜가며

그래도 살아가는 것 대체로 까닭 없다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동학시인선,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