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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4)와 나무

by 김창집1 2024. 9. 19.

 

 

천 개의 질문

 

 

오후의 역광으로 찍는 뷰파인더 속 나무 한 그루

시커먼 실루엣으로

하늘을 떠받친 채 무섭게 서 있다

 

천 년을 넘게 산 은행나무

 

거대한 나무 밑에 서서

고개를 꺾어 하늘같은 꼭대기를 쳐다본다

나무의 끝을 알 수가 없다

 

세상일이 안과 밖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서

부동의 자세로 대웅전을 바라보는 나무

 

저 가지 어딘가에 붙었던 나뭇잎으로

수많은 인연이 겹을 만든다

아직 이루지 못한,

가지에 매달고 있는 천 개의 질문

 

천 개의 눈이 있고

천 개의 귀가 있어

천 년을 산다는 것은 나무 하나만의 목숨은 아닐 것이다

 

그에 일 할도 안 되는 목숨으로

그를 엿보는 것 같아 가슴이 쿵쿵거린다

 

나는 아득한 나무 앞에서

너무 높게 서 있었다

 

 

 

 

편지를 기다리며

 

 

그는 모르고

나는 기억한다

어둠에 싸여 한쪽만 아는 사람,

찾아오는 것을 기다린다

 

그러나 주소를 묻지 않는다

 

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그에게는 그때가 순간이었고

내겐 상처라 영원으로 새겨졌다

 

내게 말한 것들이

안에서 봉해지고 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닫히지도 않고

잘 열리지도 않는 꽉 물린 입

 

들여다볼 수 있는 구명이 있어도

문을 열고 들여다보아야 안다

 

꼭 손을 넣어

만져보아야만 안다

 

편지는 도착하지 않을지 모른다

 

 


 

책은 새가 되어 날고 싶다

 

 

처음으로 따뜻한 손에 잡혀

등을 펴고 눕는다

꽂힌 그 자리에서 면벽하고 오래 박혀 있어

뻣뻣하게 굳은 몸은 꾹꾹 누르지 않으면 펴지지 않는다

 

그저 바람 한번 타고

등을 눌러 날개를 펼칠 때

부풀어 벌름거리는 콧구멍

날개 없는 새가 난다

 

가끔 옆으로 밀린 적은 있으나

한 번도 얼굴을 내보인 적이 없다

앞뒤 서로 달라붙어 숨도 못 쉬었다

책상에 누워 심호흡 한다

몸이 말랑말랑 살아난다

 

보이지 않는 지문이 얼룩처럼 남는다

한 세계가 열린다

 

 


 

폐선

 

 

  뱃머리는 거침없이 파도를 밀고 나아간다 좌우현의 오래된 균형이 삐걱거리며 서로 맞잡은 손을 거두어가자 갈라진 파도가 비명을 내지른다

  몸통을 지나 어깨 위로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앉을 때까지 뱃머리는 무지근해지는 통증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날카로운 예지는 분명한 걸 챙긴다 단호하게 잘려 나간 꼬리를 슬며시 감추고 씻은 일굴 내미는 건 부끄러운 변명이다

수평선에 맞닿은 흐리멍덩한 하늘이나 경계선을 뭉개버리는 저녁 안개는 늘 무시당하는 편 말이 없는 것들은 모호해서 경계를 흐린다 배의 무던 허리를 훑으며 지나간 물결이 고물에 고물고물 맴돌거나 소용돌이치며 뒤따르며 밀어 주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달리는 말이 뒤돌아본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 지나간 후미는 곧 사라질 물거품일 뿐이다 사라질 것에 대하여 사랑을 퍼주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뱃머리를 벗기는 짱짱한 햇빛만이 대쪽같이 당당하다

 

  앞만 보고 달리던 뱃머리는 고물 뒤에 숨은 시선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켜보며 뒤따르며 드러내지 않을 뿐 침묵으로 밀어주던 그 물결이 흘수선 아래 감춘 어미의 마음을 아주 환하게 비춰주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가벼운 식사

 

 

  볼록한 엉덩이 그 보드라운 살결은 언제든 손을 뻗으면 닿으므로 관심을 접어 둔다 구수한 냄새 날아가고 수분이 빠져나가며 결 따라 마른 길들이 드러날 때쯤, 편한 대로 한 끼 때우기 위해 비닐봉지 안에서 버썩 마른 식빵을 집어 든다

 

  진열장 위에선 그럴듯하게 바람 부푼 모양새의 식빵, 쭈그리고 있는 검은 비닐봉지 속으로 다시 구겨 밀어 넣어야 할 하나의 의식일 뿐 먹이야 할 양식은 아니다

 

  예의를 갖추어 온유하게 대하는 밥에서 손아귀로 찢어 먹는 야성의 진보 김이 빠진, 온기가 없는 빵을 씹으며 꾸역꾸역 넘어오는 타성을 밀어낸다 단맛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친밀한 아주 친밀한 이 가벼운 식사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서정시학,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