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막 여행 – 김병택
햇빛이 작열하는 날에야 소원대로 사막을 길을 수 있었다 사막은 거친 바람으로 가득했다 여행 전에 머리에 떠올렸던, 무지개가 뜨고 미풍이 불며 길가에 야생화들이 웃고 있는 사막은 천국에서나 있을 법했다 쉬지 않고 부는 바람은 멈출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더욱 막막하게 한 것은 가야 할 방향을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였다 오아시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 존재하는 건 확실했지만 거기엔 번들번들한 샘물과 샘물을 둘러싼 주변에 지친 모습으로 서 있는 몇 그루 나무가 고작이었다
거듭 쌓이는 피로가 륙색 안의 곳곳에까지 스며든 것을 무게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 한가운데로 몰려들었다 이 국면을 벗어날 방안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결국, 우리는 여행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사막을 벗어나 다른 길을 찾아야 할 단계에 이른 것이다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순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에는 마음의 사막이라는 또 하나의 사막이 겹쳐 있을 뿐이었다
♧ 아름다운 초대 – 김순선
어느 날
좋은 일이 있다고
ㅅ 시인이 지인들을 불렀다
무슨 좋은 일일까?
각자 좋을 대로 상상하며
달려갔다
화려한 식탁 위엔
평소에 가까이하지 못하는
포크와 나이프가 놓여 있고
앙증맞은 꽃병에선 철쭉이 웃고 있다
창문 가까이 다가선 한라산을 바라보며
스프를 먹고
샐러드를 먹고
고기를 썰고 난 후
중대 발표를 하였다
ㅅ 시인의 집 정원에
철쭉과 조팝꽃이 만발하여
함께 즐기고 싶다고
♧ 저 입, 입들 – 김승립
정치가도 종교인도 시인도
마치 은총의 꽃비 뿌리기라도 하듯
수많은 구원과 사랑을 떠들어 놓고
그 입으로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색 한 번 변하지 않고 또 다른 약속의 악다구니 쏟아낸다
저 입, 입들
그들의 입은 아귀처럼 부풀어 커지고
그 입만 바라보는 이들은 잠시 귀 흔들다가도
시나브로 그 입의 주술에 마취되어
동굴 같은 어둠에 스스로 대가리를 들이민다
세상은 온통 입으로 건설된다
똥꼬 핥던 입으로 희망의 마천루를 올리고
토악질한 입으로 사랑의 시를 낭송한다
♧ 사하라의 꿈 – 김대용
1. 안개 속에서 태어난 달맞이꽃 가까워질수록
미소 짓다가 멀어질수록 침묵한다.
올리브 가지 들고 줄지어 기다린다.
초승달로 시작하여 보름 지난밤까지
끊는 욕망 잠재우는 물결 드리운 모래바다
유목의 품에서 자라 기슭으로 흩어진다.
아직은 누구의 손길 허락하지 않는
바람이 흐르는 곳으로만 이야기 전할 수 있는 사하라
2. 사랑하려면 우선 기억하기 바라. 단 한번 뿐인
내 모습을 내일이면 사라지고 마는 그림자를
한 줌 움켜 지고 느낀 그 감촉
가릴 수 없는 텅 비고 말라버린 바다의 폭풍을
기억한다. 그리움이란 주소는 바꿔지는 것이 아닌 것을
듣기만 하지 아니면 느끼기만 하지
받아드리기만 하지 내 안에 바람들을 안고
내 안에 가두어 두고 후회하며 해체되어
말라비틀어지고 날려야 될 낡은 외투에서
달아오르는 오래된 절교의 편지처럼
3. 바람이 눈을 흘기며 휙 지나간다.
가로수 기대였던 몇 장 남은 가을도
뒷걸음치더니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다시 기도가 마지막 남은 희망이다
창밖에는 살집 넉넉한 뭉게구름이 떠있다
밤새 네온사인으로 화장했던
빌딩의 유리창에 가려진 방안에는 취한
눈물을 감싸 안고 사랑해 그리고 믿어줘라고
속삭인다. 이제 가을은 혼자 걸어가는 숲길에서
밟힐수록 부서져 어지럽게 흩어진다.
줄지어 낮은 목소리를 내며 따라오던
들새처럼 낯선 그림자들이 뒤따라오고
그림자 숨길 휴일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잿빛 커튼에 가려진 방들이 다시 어둠을 기다린다.
바람 탄 가로등이 흔들리고 하나 둘
불 꺼진 창가에 매일 버려지는 불나비들이
서툰 이국어로 얘기한다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통권 제85호)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6) (1) | 2024.09.22 |
---|---|
월간 '우리詩' 9월호의 시(3)와 '흰진범' (1) | 2024.09.21 |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4)와 나무 (0) | 2024.09.19 |
김신자 시조집 '봄비에 썼던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완) (9) | 2024.09.18 |
김항신 시집 '연서戀書'의 시(6) (0) | 2024.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