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로 – 임보
아직 시비도 문학관도 없고
세울 땅도
세워 줄 사람도 없다고
너무 안타까워 마시라
만일
그대가 좋은 작품만 낳는다면
이 세상 사람들의 가슴이
그대 시의 비각이 될 것이고
이 세상이 곧
그대의 문학관이 될 것이다
♧ 장맛비 – 정봉기
갑진년의 6, 7월
그날이 그날인데
자연의 시계는 얼추 맞아 간다
기후 온난화, 기상 이변이라지만
탈이 나면 난 대로
일, 월, 년은 흐르고 있다.
의지의 날을 세우고
격정의 말을 내 세운들
잡아 둘 수 없다.
숲을 타고 넘는 바람을
무슨 수로 돌릴 수 있겠는가.
힘겨루기는 상처만 덧내
공멸로 갈까, 걱정이다.
에서 멈추었으면 한다.
통증에 아파하는 장맛비,
거칠어지는 모양새다.
♧ 나들목 - 정순영
하늘을 머리에 이고
드나들 줄 모르다가
황야에서
단번에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어
말씀을 드나들며
하늘을 보네
드나들면서
생명의 꼴을 배불리 먹네
♧ 목단꽃 당신 – 허기원
영롱한 이슬방울 가신 님 눈물일까
예쁜 꽃 은빛 여울 목 메인 저 여인아
초승달 새벽 별 따라 풍경 소리 서러워
눈부시게
핀 자홍紫紅
꽃송이 어여뻐라
여우비
시샘 속에
다소곳이 터진 꽃
그것은
핀 게 아니라
그리움이 열린 것
눈물꽃 하안 별꽃 내 가슴에 피어 운 꽃
사랑해 않았으면 울리지는 말았을 걸
먼 훗날 꿈속에 서도 너를 잊지 않으리
♧ 임차인 – 김나비
태어난다는 것은 몸을 빌리는 일이지요
공인중개사의 소개도 없이, 임장 한 번 못 간 채로 말이지요
가진 건 영혼밖에 없으니 그걸 보증금으로 걸어야겠어요
고 살을 붙여 시간을 들이는 일이겠지.
사는 건 몸에 숨을 불어 넣고 살을 붙여 시간을 들이는 일이겠지요
입주하는 날은
복사꽃 해사하게 웃는 날이면 어떨까 싶다가도
눈발이 세차게 흩날리는 날도 괜찮다 싶어요
추운 날일수록 가족의 눈빛이 난로처럼 느껴질 테니까요
어차피 빌리는 거 반짝이는 몸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봐요
잘나가는 엄마 아빠도 있고 요크셔테리어도 한 마리 있으면 좋겠어요
카랑카랑하게 짖으며 나를 지켜줄,
마당엔 그네가 있는 집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운 중에 가장 큰 운이 몸을 잘 빌리는 것
멋진 몸은 운 좋은 사람들 것이겠지만,
언젠가는 내게도 운이 들어오는 날이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시인의 몸이네요
이번 생은 폭망이지만
쌍방 계약이 아니니 취소할 수도 없고
시를 팔아 비루하게 살 수밖에요
돌려준다는 것은 몸을 벗는 일,
늦털매미처럼 껍질을 벗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반환의 의무는 꼭 지켜려 해요
무릎 나온 바지 벗듯 미련 없이 발을 빼야죠
노을이 상리 터널 병목현상처럼 몰려오는 저녁,
우암산 휘도는 바람으로 귀를 씻고
맡겨 놓은 영혼을 찾아
깔끔하게 그렇게,
*월간 『우리詩』 9월호(통권435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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