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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장영춘 시집 '달그락, 봄'의 시(10)

by 김창집1 2024. 10. 1.

 

 

어머니의 방*

 

 

곰삭은 시간 너머

건듯건듯 바람 불면

그곳에선 늘 마른 풀 냄새 풍겨온다

태초의 요람을 흔드는 웡이자랑 웡이자랑

 

아직도 그 소리가

환청으로 되살아나

 

풀죽 한 끼 먹인다며 주걱 휘휘 젓다가

솥에서 건져낸 모정 들판 위에 누웠다

 

이별은 예고 없이,

날아오는 화살처럼

명하니 화석이 된 오백 장군 아들들이

철쭉 빛 하늘 한 자락 떠받들고 있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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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방: 제주돌문화공원에 있는 설문대할망을 기리는 방.

 

 


 

산방산, 그 자리

 

 

누가 저 산중에 돌의자를 빚었는가

한라산 봉우리로 만들어진 산방산엔

 

언제나 목젖이 부은

까치들이 살고 있지

 

메아리로 가득 찬 그 길 위에 마주 서면

해종일 기다려도 너는 다시 오지 않고

 

발갛게 노을 속으로

새 한 마리 날아간다

 

밤마다 다시 돋는

의지에 찬 별빛 따라

 

가쁜 숨 몰아쉬던 설문대할망 신선의 자리

산방산 선인 탑 바위, 턱을 괴고 앉았네

 

 


 

수산 유원지

 

 

동네 마실가듯 다녀가는 바람결에

갇혀있던 물들이 수면水面 위로 닿을 듯 말 듯

짜르르 은어 떼 햇살 저수지에 내린다

 

한때는 수산리 하동, 번지마저 묻히고

소금쟁이 지난 길에 물수제비 뜨던 날

까르르 아이들 웃음 골목길을 맴돈다

 

그리운 것은 늘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잔설 덮인 한라산이 한 발짝 다가서면

오백 년 곰솔 나무의 굽은 등이 펴질 즘

 

만개한 추억들이 제방 위로 올라와

찰랑찰랑 꿈을 꾸며 손 맞잡던 친구여

수신자 주소도 없는 너의 안부를 묻는다

 

 


 

표해록 발자취 따라

    -장한철 표해록

 

 

꿈은 꾸는 자의 몫이라 누가 말했나

1770년 한양으로 과거시험 나선 발길

한겨울 검푸른 파도 조천바다 뒤로하고

 

모든 것은 한순간,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망망대해 파도 끝자락 저만치 떠밀리며

풍랑에 몸을 맡긴 채 미아처럼 떠돌던

 

부푼 것들은 모두 바닷속에 수장됐다

삿대도 하나 없이, 희망마저 놓친 채

깜깜한 절벽 끝에서 사투를 벌이던 밤

 

구사일생 살아나 꿈속에 짧은 인연

개매기 하트 안에 밀물이 들 때마다

청산도 십 리 길 따라 동백꽃을 피운다

 

 


 

창꼼바위

 

 

언제 한번 다리 뻗고 쉬어본 적 있었던가

 

북촌리 환해장성 고망 난 돌 사이로

 

다려도 노을 앞바다 쏟아지는 붉은 화살

 

 

                        * 장영춘 시집 달그락, (한그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