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마음
눈이 내리는데 여태 잎을 떨구지 못하고
그대로 말라 있는 키 낮은 단풍나무를 본다
훌쩍 떠나버리는 것도 능사는 아니지만
꽃은 질 때 져야 하고
가야 할 것들은 가야 아름답다
꼭 맞는 제 계절을 알고 가는
어떤 이별은 찬란하기까지 한데
손이 부르트게 골똘히 물만 퍼 올리다가
그만 지쳐 주저앉아버리면
혀에 새길 말조차 없어 누추해진다
마음 약해 떼어놓지 못해 주저한다고
억지로 매달리는 것이
사랑은 아닐 텐데
한때 붉었던 마음 있었다면
최선을 다해
꽃처럼 뛰어내렸어야 했다
영원이란
색이 바래지고 피부가 말라 버짐이 필 때까지
둘 사이 차가운 공기가 흐르고
믿음이 희박해질 때까지는 아닐 텐데
♧ 버려진 장롱
여기저기
큰 덩치 이끌고 다니느라 많이 지쳤다
언제나 가장 먼저 들어와 자리를 지켰고
가장 나중에야 방을 나갔다
무거운 짐이 되어
일꾼 발등 찍을까 조바심도 내고
손 놓치면 깨질까도 두려웠다
평생 품에 안고 지키던 것들이
집을 비우고 다 떠나갔다
곱게 마주 잡던 아귀가 뒤틀리고
입을 열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 난다
포근한 것들만 가지런히 쌓아놓던 방
늘 거울 앞에 섰던 얼굴이
철 지나 말라버린 수국처럼 거슬린다
갈 때는 뒤끝 없이 가야 하는 것
물이 마른 저 계곡 어디쯤
패인 산기슭 그 어디쯤에서
찢어져 썩거나 더럽혀져선 안 된다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져서도 안 된다
좋은 관 아니더라도
등짝에 주소 한 장 써 붙이면
매장이든 화장이든 산 흔적 지워주니
가벼워지는 몸
가슴에 핀 꽃나비
그림자 지는 쪽으로 꽃그늘이 기운다
♧ 눈사람
처음부터 위태롭게 태어난 건 아니었다
전혀 바라던 자리가 아닌 곳에서
몸통으로 서 있는 불안한 직립
흔들리는 나무 위에선 잡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적요한 밤이 지나면
해가 솟는 아침이 온다는 것을 간과했다
뺨을 때리는 바람만이 너를 견디게 하는 힘
말은 입에서 생기지 않고
희망을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한때 순백으로
가만가만 길을 찾던 잃어버린 발꿈치를 들고
창 안을 들여다본다
네가 던져놓은 선물꾸러미가 집집마다 쌓여 갈 때
넌 나무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눈처럼 부서져 내린다
끼니도 거르며 밀고 가는 택배 카트에
어지럽게 달려드는 밥풀 같은 눈송이
하루를 달려 덩 비워낸 저 짐칸에
무엇을 담아 돌아가야 하는지
젖은 주소를 읽으며 먹먹해진다
이미 내일이 와버렸다는 것도 모른 채
서서히 체온을 올리며
그 자리에서 날개를 터는 눈사람
♧ 가을, 파크 프리베*
친구 열 명이 모이면
지나간 사람 열 명이 보인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은 각각 달라도
한 곳으로 시선을 모은다
모자를 벗고
민감하게 머리숱을 세고
바람에 날리는 겉옷의 두께를 잰다
잘 넘어가는 술처럼 고운 추억은
책갈피에 쌓이는 이야기가 되고
입에 맞지 않은 걸리는 고명
버섯과 햄과 다족류가 까끄라기처럼 씹힌다
굳은 국숫발처럼
소화되지 않은 단어들이 접시에 남는다
창밖은 소란스럽게 겨울을 좇아가는 가을이
성마르게 붉은 단풍을 휘몰아쳤으나
아무도 다른 계절을 묻지 않는다
둥근 탁자를 에워싼 시간은
각자의 기호대로 기억을 저장한다
지금은 온기 한 장으로
무겁고 커다란 접시를 덮는다
거기 곁에 있어도
지나간 열 사람 얼굴이 찬찬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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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크 프리베 : 의정부 장암에 있는 카페.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 (서정시학,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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