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크렁
얼룩진 그림 꺼내
덧칠을 다시 한다
한여름 소낙비에
흔적 없이 지워졌다
지워져 마른자리에
떼로 피는 수크렁
그냥 갈까 머뭇대던
백약이 거친 손등
설핏 스쳐 데데한
낱알 같은 눈물이
저 속내 미처 몰랐다
환히 비워둔 자리
♧ 빨래가 널린 집
1.
널린 빨래 보면
세상 참 가벼워진다
삼각 지붕 그 아래
에곤 실레의 사람들
나란히 서로가 기대
축 처진 어깨를 견딘다
2.
그림자 길게 누운
옛집 너른 마당
시래기 시들 듯
빨래도 시들어 간다
긴 골목 돌아 나오면
팽팽해진 수평선
♧ 붉은 벽, 능소화
울타리 그쯤이야 넘는 게 다 아니라며
창가의 대범한 너 하늘 곁에 서겠다고
지붕 위 기어이 올라, 눈물 쏙 뺀 초가을
♧ 그때 빨간 사과는
엄살처럼 고집처럼
고개 돌려 누운 방
동생하고 어머닌
사과 한입 베어 물고
이 세상 나를 잊은 듯
과즙 향에 속이 타던
같이 먹자 깨우길
한참을 기다려도
그럴 기색 전혀 없어
동굴 같은 이불 속
눈물과 낙과의 타점
그렁그렁 맺혔지
♧ 오래된 방
반쯤 열린 문 안으로 살며시 들어서면
공중 벽 걸려 있는 갖가지 농기구들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마른 흙냄새 익숙히
자전거 페달 드럼통, 말안장 뒹구는 편자
사진 속 할아버지 유품도 그저 놀이하기 좋은
창 틈새 들이치는 햇살, 언덕배기 이르러
돌담 밭가 밀쳐둔 젖 냄새 아기구덕엔
떼쓰던 착한둥이 스르륵 잡긴 눈꺼풀
헛간을 이내 나섰는지 밥때도 다 잊는다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 (가히,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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