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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9)

by 김창집1 2024. 10. 14.

 


 

수크렁

 

 

얼룩진 그림 꺼내

덧칠을 다시 한다

 

한여름 소낙비에

흔적 없이 지워졌다

 

지워져 마른자리에

떼로 피는 수크렁

그냥 갈까 머뭇대던

백약이 거친 손등

 

설핏 스쳐 데데한

낱알 같은 눈물이

 

저 속내 미처 몰랐다

환히 비워둔 자리

 

 

 

 

 빨래가 널린 집

 

1.

 

널린 빨래 보면

세상 참 가벼워진다

 

삼각 지붕 그 아래

에곤 실레의 사람들

 

나란히 서로가 기대

축 처진 어깨를 견딘다

 

2.

 

그림자 길게 누운

옛집 너른 마당

 

시래기 시들 듯

빨래도 시들어 간다

 

긴 골목 돌아 나오면

팽팽해진 수평선

 

 

 


 

붉은 벽, 능소화

 

 

울타리 그쯤이야 넘는 게 다 아니라며

 

창가의 대범한 너 하늘 곁에 서겠다고

 

지붕 위 기어이 올라, 눈물 쏙 뺀 초가을

 

 

 

 

그때 빨간 사과는

 

 

엄살처럼 고집처럼

고개 돌려 누운 방

 

동생하고 어머닌

사과 한입 베어 물고

 

이 세상 나를 잊은 듯

과즙 향에 속이 타던

 

같이 먹자 깨우길

한참을 기다려도

 

그럴 기색 전혀 없어

동굴 같은 이불 속

 

눈물과 낙과의 타점

그렁그렁 맺혔지

 

 


 

오래된 방

 

 

반쯤 열린 문 안으로 살며시 들어서면

 

공중 벽 걸려 있는 갖가지 농기구들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마른 흙냄새 익숙히

 

자전거 페달 드럼통, 말안장 뒹구는 편자

 

사진 속 할아버지 유품도 그저 놀이하기 좋은

 

창 틈새 들이치는 햇살, 언덕배기 이르러

 

돌담 밭가 밀쳐둔 젖 냄새 아기구덕엔

 

떼쓰던 착한둥이 스르륵 잡긴 눈꺼풀

 

헛간을 이내 나섰는지 밥때도 다 잊는다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가히,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