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동 - 장문석
지금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
한철 무성했던 자음일랑 저만치 떨궈 내고
형형한 모음의 뼈대 몇 개만을 추슬러
한 그루 감태나무로 서야 할 때
문득 높바람은 눈시울을 씻어 가고
하늘 한복판 일필휘지로 날리는
기러기 떼의 서늘한 서한체
그 삐침과 파임에 골몰하여
밤늦도록 촛불을 밝혀야 할 때
똑, 똑, 똑
조용히 나이테를 두드리며
한 줄 한줄 일기를 써야 할 때
그렇게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
묵언의 울림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
지금은
♧ 여의민국 - 홍해리
어느 천년에
황하가 맑아지겠느나
백년하청이지
해가 뜨지 않는 세상
어느 세월, 어느 구석에
꽃 피는 봄날이 올 것인가.
여우도 쥐새끼도 정치적인
여의민국
일락서산일 것인가
천년일청이라도
천리동풍 불어
천리만리 꽃향기 날 것인가.
♧ 전철에서 – 최병암
어제는 제물포에서 용산까지
오랜만에 전철을 탔다네.
스물세 개의 역을 모두 지나는 완행열차.
약 40년 전 대학을 다녔던 그 노선.
지금도 역 이름들은 변함이 없었네.
역마다 출입문이 열리고
사람들은 옛날처럼 힘겹게 내리고
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열차는 오래심에 정해진 운명의 철로 위에 시지프스처럼
그 육중한 쇠바퀴를 굴리며 무언가에 또 끌려갔다네.
둔탁한 쇳소리가 발아래서 가벼운 진동으로 느껴질 즈음
휙휙휙 차창 밖으로 더욱 칙칙해진 낡은 건물들의 뒷모습이
부끄러운 듯 재빠르게 몸을 숨기고
차창에 희끄무레 비친 한때는 젊었던 내 얼굴이
또 빠르게 지나갔다네.
그 아득한 옛날, 무명無明의 보도步道에서
닿을락 말락 한 그 출입문이 열리고
나는 오르지 못하면 지옥 불에라도 떨어질세라
간신히 열차에 몸을 실었었지.
열차는 나도 모르는 정해진 길을 따라 달리며
한 정거장마다 찰나와도 같이 정차했네.
그때마다 낯선 이들이 타고 또 내리고
한 정거장을 지날 때마다 나는 늙어갔다네.
내릴 정거장이 어느덧 다가오는데
한강철교를 건너는 요란한 레일의 진동 소리가
문득 회상에 잠긴 나를 흔들어 깨우고
멀리 서방西方의 바다로 끝없이 흘러가는
무량無量한 강물의 너울진 물결마다
장엄한 노을이 조각 져 물들어 있었다네.
얼마 안 있어 다시 무명으로 들어가는
나의 마지막 문이 열리면
낯선 젊은 사람들은 또 운명처럼 올라탈 것이고
나는 초연히 운명의 열차에서 내려
홀가분한 몸을 저 한강의 너울 위에 누일걸세.
타고 내리는 것이 이제 진부한 일이 되어 버린
또 다른 하행선의 오래된 전철 한 대가
내가 탄 열차를 순식간에 스쳐 지나더군.
♧ 오방색 국수 – 김정식
추석
선물 하나
오방색 국수
하롱베이의 섬만큼이나
낯설지만
순수한 손 글씨
선생님 감사해요
어머니 연세가 마너시죠
저의 어머니도 마너요
어머니 사실, 한국문화가 바뀌었어요
예전엔 선물을 주고받았지만
지금은 주스 하나도 안돼요
정성스러운 선물 마음으로 받을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알아요
선생님 국수예요
선생님 어머니, 어머니, 오래 사세요
오방 국수
다섯 가지의 색깔
오래간만에 본 전통색
단아한 한복에 그려진
신명난 탈춤에 그려진
이국땅에서 간직한
오방색
어머니의 입술처럼
오물오물
늙어 간 전통색
상담이 끝난 후,
생각의 긴 국수를 늘여 보며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시던
어릴 적
오방색을 반죽해 보았다.
♧ 남해 - 남택성
오래되어 내 거울 같아진 친구가 있다
충주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독일로 가더니
한 철씩 찾아와 남해 독일 마을에 산다
불행을 다 돌아온 길은
남해에 와서 잘도 쉬는 것이다
언덕 위의 집
비슬나무 숲 너머 바다를 불러오는 창 앞에
어쩌다 나란히 앉아
붉은 길들이 구불거리며 바다로 가는 걸 본다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먹다가
막 만화 속에서 나은 사람처럼
친구가 입안이 보이도록 환히 웃으면
먼 곳으로 떠나려다 돌아온 사람처럼 슬픈 눈으로
나는 그 웃음에 내 얼굴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월간 『우리詩』 10월호(통권 제436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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