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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의 시(12)

by 김창집1 2024. 11. 15.

 

 

가파도 뚜껑별꽃

 

 

바람과 하늘과 무슨 모의하는지

 

그리움 포개어 납작해진 당신은

 

해안가 내리는 별들 조각조각 품었네

 

 


 

2

 

 

오래 살아 미안하다 자꾸만 뱉는 말에

눈 녹는 한라산자락 골짜기 살짝 열어

그 마음 잘 안다는 듯 입김 불어 을리시네

 

지독하지 않고서야 향기로 어찌 맺나

저 린 발뒤꿈치가 걸음마다 갈라져

헤아려 딛지 못해서 줄어든 그림자여

 

꼭꼭 씹어 드시라 연신 권해 드리면

앞접시 올려놓은 찬 내게로 또 옮겨와

한술도 버거우신지 자꾸 더는 숟가락

 

 


 

멀구슬나무의 각주

 

 

꽃과 잎 열매마저, 다 떨치고도 부족했을까

 

수족 같은 곁가지들 곤두박질 바닥으로

 

오래전 그늘 자리를 들추어내 각인한다

 

긴 겨울 뉘일 바람 어느 모퉁이 돌아와

 

주저앉던 허술한 변명, 툭 치는 이 아침녘

 

빗자루 쓸리지 않아, 맨손 가득 주위 들다

 

 


 

시시한 영화

 

 

  치솟는 연기에 어둑한 화면으로

 

  맘껏 부푼 마음이 별안간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허물어진 밭 돌담 하늘로 치솟는 검은 연기, 무장한 순경과 밧줄 꽁꽁 묶인 사람들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폭도 폭도다! 외치는 쟁쟁한 소리 자꾸 끊기는 얼룩지던 화면, 땅을 치며 울부짖는 흰옷의 어머니, 웅성이는 사람들 틈 핏빛 얼굴들 무엇인지 모를 저 슬픔에 자꾸 눈가로 손이 올라가고 남문통 교회 강당 공짜로 본 영화는 재미있는 장면은 끝까지 안 나와서, 우르르 소문 듣고 몰려갔던 저녁나절, 한껏 들떴던 우리들을 꾹 눌렀다 터벅터벅 집으로 가면서도 두려움인지 서로가 눈치만 보던 아이들의 그 밤길, 반공영화는 시시하다고 부연 연기 속에 숨 막히던 답답함을 훌훌 털어내었지

 

  영화는 재미있다는 말, 오래도록 안 믿었지

 

 


 

바람까마귀

 

 

새들도 피치 못할 일이 있어 떠나왔을까

전깃줄 빼곡히 검정빛의 저 행렬

 

분쟁 속 내몰리는 사람들 그 누가 난민인가

 

헤어질 염두에, 생명을 담보로 한

팔뚝에 이름 새긴 가자지구 아이들

 

그 눈빛 차마 보고 만,

슬픔마저도 사치다

 

먹빛의 하늘 아래 실시간 방영되는

손 놓친 핏빛 맨발 어디로 가야하나

 

공포탄, 날갯짓 새들 일제히 날아오른다

 

 

              * 김윤숙 시집 저 파랑을 너에게 줄 것이다(가히,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