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낯선 사람 - 강순자
낯선 사람이
느리게 다가오는데
가까이 있으면서
멀어져가는 사람을
재빨리 붙잡고
하루 종일 매달리며 끼니를
내민다
알 수 없는 곳에서
새어나오는 깊은 한 숨
깊은 웅덩이에 고인 물줄기
흘러서 새어나오는 물비늘 같기도 한
조금씩 끈을 놓아
푹 잠들어 버린
잠든 적도 없이 불투명한 삶의 애착들
바람과 하늘
사이로 보이는 것들이 투명함
깊은 심연에 고인 물줄기들이
빙빙빙 돌고 돌며
여기까지 오느라 너덜해진 소용돌이 수명
낯선 이보다 더한
차가운 눈초리가 애처롭기만 한
무질서한 기억의 끄나풀들
♧ 시인의 농장 – 강익범
한라산 끝자락
소나무로 우거진 숲속 길 따라
하천 너머
발길 닿는 곳이 있다.
눈부신 햇살이
아침을 여는 숲속에는
파란 하늘이 맑음을 품어주고
새들이 놀이터가 되어
숲속의 요정들이 향연을 일삼는다.
우뚝이 서 있는 원두막 정자는
알뜰 쉼터가 되어
차 한 잔에 여유를 부리고
민오름 풍경을 음미한다.
소나무 이슬방울에
편백나무 피톤치드가
향기를 더하고
예덕나무 사이로 고운
해가 솟아오른다.
넝쿨 터널 흑오미자는
풀벌레들의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 주고
보라색 가지는 손을 흔들어대며
하늘 높이 치솟는다.
대나무 숲길 따라
양하 꽃을 피우고
곳곳이 들꽃으로 가득하다.
저녁 황금 노을이
사뿐히 내려앉는다.
밀려오는 어둠 속에
풀벌레 협주곡이 울려 퍼지고
반딧불이 등불을 밝힌다.
카멜레온 하안 쑥이
달빛 속에서 살며시
초원을 덮는다.
별 뜨락에 떨어지는 별빛은
생명의 숲에 머물고
아스라이 멀어진 별빛은
우주에 머물고 있다.
♧ 비 오는 날 – 곽명진
그 때가 언제였더라
나의 사춘기 시절쯤
일흔이 훌쩍 넘으신 어머니가
지금의 나보다 20년은 더 젊었을 쯤
한동안 가물어서
밭에 모종을 심지 못했다
마침 비는 내리고
아버지는 먼데 일가시고
30대인 어머니가 5남매 독박육아에
지쳐 있을 때쯤
내게 화가 나셨을까
커다란 비닐 위에
다림질 슥슥 몇 번 하시고는
비옷을 뚝딱 만들어 입히시며
“앞장 서거라”
호미와 모종을 챙기시고는
밭으로 갔다
눈물일까 빗물일까
실컷 울어도 될 양이건만
난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그저 억척같은 어머니와
억척같이 쏟아지는 비와
내 손에도 쥐어진
호미와 옥수수 모종만이 그립다
* 돌과바람문학회 간 『돌과 바람 문학』 2024 가을(통권 제15호)에서
* 사진 : 제주의 돌과 풍경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직형 시집 '천개의 질문'의 시(13) (1) | 2024.12.04 |
---|---|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7) (1) | 2024.12.03 |
'제주시조' 제33호의 작품(2)과 파도 (0) | 2024.12.01 |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6) (0) | 2024.11.30 |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12) (0) | 2024.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