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 강 다슬기
눈의 초점을 한곳으로 모아
길을 잃고 창을 바라다보면
물속에 참긴 아득한 마을이 뜬다
어스름 저녁,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낮은 강바닥
작은 돌과 왕모래가 점, 점인 마을
말간 수면 속에서
간간이 해파리처럼 지나가는 구름을 잡는다
배배 꼬인 초록 내장까지 빼물고
깔깔거리던 어린 다슬기
가끔 바위 같은 문을 빼꼼히 열고
물컹한 발을 내디뎌본다
돌 틈에 감췄던 다슬기의 작은 성
잔물결에 휘감기며 단단해진다
간질간질 발목 감싸고돌던 여린 강물이
차곡차곡 돌을 쌓아 탑을 만든다
돌 틈에 길을 찾는 다슬기 따라
도란도란 옛 골목길 해그림자 지나면
먼 길 떠나는 나그네처럼 어둠이
휑한 골목에 우두커니 선다
넓은 강 점잖은 흐름을 잊은 채
하늘이 배경인 낮은 강바닥에
작은 돌과 왕모래 같은
다슬기 오래된 집들을 끌어안는다
♧ 21세기 보물창고
미세 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한 날
몸은 내 안에 연금되어 아무것도 하기 싫어
나 아닌 나에게 안부를 묻고 있을 때
오랜 항해 끝에 회색 빌딩 사이로 지친 해적선을 정박하고
허름한 청잠바 자락을 휘날리며 애꾸눈 선장 책이 불쑥 나타난다
길가에 늘어선 옷가지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동굴 같은 선실은 기역으로 꺾여 옷으로 싸여버린다
나는 어디로 끌려가고 있나
금간 시간들,
채웠다 풀었다 수수께끼 같은
어떤 물결과 바람을 지나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를 들고
해적들은 보물을 뒤져 찾나
찾는 사람만 찾고 아는 사람만 아는 곳
헌 것들을 모아둔 곳에 보물이 있다
가려져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깊이 감춰져 있다
같은 길을 갔는데도 오늘 처음 보는 창고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것
내가 놓쳐버린 건 월까
내가 걸어온 발자국을 뒤돌아
딱 그만큼만 되돌아가고 싶다
오늘은 해적선에 잡혀 보물을 뒤진다
빈칸을 드러낸 마음 한 자락이
청바지 하나 건져 올려
나의 후줄그레한 보물창고로 옮겨 간다
♧ 모퉁이의 남자
숨을 곳을 찾는 사람이 모퉁이를 돈다
등을 돌리거나
모를 세워 선 얼굴이 비장하다
실같이 하안 냄새가 피어오른다
맴돌다가 희미하게 사라져 버리는 실체
잡히는 꼬리가 없다
예각 안으로 좁혀진 경계를 그리자
목이 뜨끔거린다
어디든 잠깐의 그늘이 되는
구석이 필요하다
남자는 볼우물을 파 숨을 들이 켜고
하늘을 향해
깊이 숨을 불어 낸다
누구도 지울 수 없는 견고한 신앙
그가 추앙하는 신에게
홀로 피워 올리는 제의祭儀
구석을 찾는 구부러진 의심으로부터
길을 찬연히 열어주는 경건한 손
둥글게 만 손가락을 받쳐 v자 그리며
영혼을 빨아들이는 호흡과의 밀회
떨리는 손으로 모퉁이에서
날마다 속을 그을어 태우는
그의 계절은 그늘이 깊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 (서정시학, 2024)에서
*사진 : 멕시코 마야 유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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