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물 – 제갈양
그저 살짝 눈길이 닿았을 뿐인데
손톱 깊숙이 꽃물이 들 때 있지요
우연이란 애초 있을 리가 없어요
인연이란 무르익어야 배어들지요
그대 흰 손가락 위에 머문 바람에
먼 별들 몇, 얼굴 붉히며 반짝였지요
명주실로 비끄러맨 그대 생채기
매만질수록 깊어지는 꽃물이에요
♧ 밥상 항성의 기억 – 장우원
접어 세워 둔 플라스틱 항성을 꺼내
방 한가운데 펼치면
행성 혹은 소행성들이
정갈하게 모여 앉았다
식구들 가운데 자리 잡은
밥상은 우주의 중심
이 경건함을 칭송하느라
수저는 끝이 닳고
젓갈은 휘거나 짝이 맞지 않았다
가끔 항성의 중심이 무너지는 이유는
궤도를 벗어난 행성
생활의 무게 때문
다행스럽게
인유인력人有引力의 도움으로
우주는 소멸하지 않은 채
운행을 이어갔다
초신성으로 되돌아간
현비유인경주이씨 외곽에
새로운 성운이 몰려들었다
밥상은 마지막까지
식구들을 밝혀 주었다
♧ 탁란에 대한 예의 – 한상호
-아홉 살짜리를 여행 가방에 가두어 죽인 의붓어미에게
열흘 남짓 품었던
그 정 하나로
뱁새는 오늘도
애벌레를 물린다
아기 뻐꾸기 붉은 입속에
*월간 『우리詩』 11월호(통권 제437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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