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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2월호의 시(1)

by 김창집1 2024. 12. 12.

 

 

맛이 없다 임보

 

 

물을 마셔도 맛이 없고

죽을 먹어도 맛을 모르겠다

꽃을 보아도 고운 줄을 모르고

세상에 반가운 것이 없다

 

 


 

저무는 풍경 김석규

 

 

해 넘어간 뒤를 어둠 슬몃 저녁이 오고

한 평도 채 될까 말까한 삶의 쓸쓸한 자리

언제 나왔는지 흙 묻은 신발 툴툴 털어

오종종한 얼굴로 날아다니고 있는 불빛들

가난에 정 붙이고 살아가기로 작심한다면

하늘 아래 어디인들 멀고 깊다고 하라

살아온 날도 살아갈 날도 헬 수 없는데

해 넘어간 뒤를 어둠 슬몃이 저녁이 오고

 

 


 

호주머니에 대한 편견 강준모

 

 

  오랑캐 호라, 오랑캐들은 수렵과 전쟁에 필요한 주머니가 달린 옷을 입었다고 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꿈과 의심을 넣고 만지작거리면 오호라 호주머니가 된다고

 

  신용카드와 스마트폰을 넣고 도시 가운데를 갔다가 돌아오는 날은 호주머니에 꿈을 팔아먹은 영수증과 후회가 구겨져 있다.

 

  남에게 보이기 싫은 슬픔을 안주머니에 넣거나 핏기 없는 그림자가 비에 젖는 날, 나는 나의 무엇과 누구를 호주머니 양쪽에 나눠 넣는다

 

  바람이 몹시 불고 슬픔 대신 시집 한 권 받아올 정도로 크면 호주머니는 꿈도 만지작거리며 키울 수 있다고 본다

 

  고요를 순찰하는 날에는 양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좌우 날개를 접으며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펴고 고요를 건너간다

 

  어둠이 몹시 짙은 날, 호주머니는 그대의 손과 함께 더듬거리는 작은 객실, 달빛 같은 핏기가 손에 잡힌다

 

 


 

배웅 권순자

 

 

잎 낱낱이 붉은

맨드라미

찬바람에도 기개 붉다

 

제비 낮게 배회하고

어린 비둘기 가볍게 날며

작은 숲을 넘나든다

 

바람이

쓸쓸히 떠나가는 사람

옷자락 붙잡는데

 

십일월 물든 낙엽

꽃잎처럼 흩날린다

 

 


 

한로 김기호

 

 

당신은 한마디 말도 없이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서리처럼 식어 버린 시간, 당신의 마지막 숨결은

한겨울 눈꽃처럼 흩어졌고, 나는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따스했던 온기는 기억 속 잔해로 남아

한동안 떠나보내지 못했다

 

 

                            *월간 우리12월호(통권438)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