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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에서(1)

by 김창집1 2023. 11. 9.

 

 

자서

 

 

목젖 아래 가라앉아 있는 말입니다

뱃속에서부터 터득한 말입니다

 

북받칠 때

 

겨를 없을 때

 

불쑥불쑥 솟구치는 말들을

 

팽팽한 가을 수평선 위로

몇 자 올려 놓습니다

 

 

 

 

문득 흰 바람이 불었는데

 

 

길 잃어야 한다면

딱 여기서 잃고 싶다

 

밟을까 꺾을까 아님 매달릴까

 

꽃샘이 날밤을 새워도

어쩌지 못한 민오름 아래

 

이끼 깔고 낙엽은 덮고 한뎃잠을 자다가

 

, 피면 나도 피고

, 돋으면 나도 돋아

 

눈에 눈

잎에 잎 맞추는

파르르르 바람꽃

 

 

 

 

 

구순의 입덧

 

 

콩잎에 쿠싱한 멜젓 싸서 여름 넘기겠다 시고

 

생선 굽던 손가락은 핥기만 해도 베지근하다 시고

 

보말은 먹는 맛보다 잡는 맛 까는 맛이라 시고

 

빙떡은 ᄉᆞᆯ강ᄉᆞᆯ강 삶은 무채 맛이라 시고

 

찬바람엔 ᄐᆞ랑ᄐᆞ랑한 메밀 청묵 생각난다 시고

 

눈 오면 시든 고구마 삶아 ᄆᆞ랑ᄆᆞ랑 먹고프다 시고

 

 

 

 

할아버지 판결문

 

 

수박서리 꼬맹이들 할아버지 부르셔

더러는 냅다 뛰고 쭈볏쭈볏 몇은 불려가

들을라 새가 들을라 이름은 덮어두고

 

손 잡히는 데 있는 이 아이는 야의

말 들리는 데 있는 저 아이는 쟈의

숨어서 보이지 않는 그 아이는 가의

 

야의 쟈의 따고?

망은 가의가 보고?

 

허허 이 멩랑한 작당은

야의 쟈의 가의냐?

 

다시 또 들어오켕 ᄒᆞ민

일름 ᄃᆞᆯ아멩 놔두마

 

 

 

 

 

 

가끔은 나에게서 가벼워지고 싶었다

나도 모르는 올레 길에 놀멍 쉬멍 걸으멍

멍으로 다져진 땅에 발을 올려 놓는다

 

바다며 돌이며 바당이멍 돌이멍

숲이며 숲이멍 비오면 비 맞으멍

바람엔 ᄇᆞ름 맞으멍 바쁠 때는 일ᄒᆞ멍

 

다툴 땐 ᄃᆞ투멍 화 날 땐 용심내멍

기쁠 땐 지꺼지멍 말할 땐 말ᄀᆞ르멍

슬플 땐 눈물 흘치멍 가고 올 땐 가멍 오멍

 

산다 산다는 게 멍 드는 일이었네

부랴부랴 ᄃᆞ르멍 ᄃᆞ르멍 바쁨을 누렸네

검푸른 부종을 이젠 쓰다듬어야 하겠네

 

 

           *김정숙 시집 섬의 레음은 수평선 아래 있다(한그루,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