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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1월호의 시(1)와 단풍

by 김창집1 2023. 11. 10.

 

 

외투 - 이송희

 

 

사내는 외투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여전히 몸 안에는 찬바람이 불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

멀어져간 숨소리

 

지나간 사랑은 고독과 변명뿐

사내의 외투 속에서 머물던 시간이

 

스르르 풀어지면서

옷깃을 파고들었다

 

구름이 빠른 속도로 골목을 빠져나갈 때

사내는 따뜻하게 허물어져 갔다

 

오래된 슬픔 하나를

몸 밖으로 내보내면서

 

 

 

 

시험 성적서 옥빈

 

 

  내 몸에 새겨진 말들은 믿음의 무게다 너를 기록하고 있는 나는 너다 네가 견뎌낸 한계치로 만들어 낸 능력이 숫자와 단위로 기록된 나는 너를 문장으로 풀어놓지 못했지만 너의 성적은 양호하다 문제가 없는 답을 내놓은 너는 문제가 없다

 

  이름과 번호는 암호화 되었지만 해독이 가능하다 알아봐 달라는 소리다

 

  눈여겨보아야 할 사양은 아프지 않게 해 달라는 메시지다

 

  적거나 과하지 않은 노동력은 당신을 굶기지 않겠다는 표시다

 

  즉, 나무랄 데가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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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성적서 test report : 만들어진 기계의 성능을 실제로 검사하여 얻은 결과에 대한 보고서로 제품의 모델명, 생산 번호, 재질, 전기 사양, 온도, 소음도, 크기, 생산 능력 등 제품에 대한 각종 데이터가 기록되어 있다.

 

 

 

 

누에 나병춘

 

 

비 오시는 날은

나의 근본을 생각하는 날

 

빗방울 소리에 가만히 젖어 들다 보면

쏴아아 나도 몰래 대숲바람 회오리 속으로 스며든다

 

안마당 잠실에서 아득히 들려오던

석잠 누에 뽕잎 갉는 소리

 

밤새도록 실을 잣던 울 엄니 물레 돌리는 소리

아직도 세반고리관 속에서 실을 잣느니

 

나는 한 마리 누에

사랑방 젖꼭지 그리워하며 백지 위에 고치집 하나 짓고 허물고

 

 

 

 

가을 끝자락에서 임영희

 

 

  시월의 짧은 해가 설핏 기울었다 노파의 앙상한 손끝에서 고추가 붉어갔다 노파가 허리를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산등성이에 걸린 해가 사력을 다해 화려하게 타올랐다

 

  진날 마른날을 건너와 곰삭은 것들이 떠날 채비를 서두른다

 

  노파의 손가락에 와 부딪는 마른 고추의 마찰음이 맑은 가락으로 바스락거린다 노파는 화구火口에 던져질 날이 곧 다가온다고 남은 생을 가늠해 보는 것이다.

 

  물기를 거두고 도착 지점에 다다른 것들의 움직임이 숨 가쁘다

 

 

 

 

 

산은 외로워도 산을 부르지 않는다 이화인

 

 

산은 외로워도 산을 부르지 않는다

구름을 불러들이지 않는다

누군가 부르면 메아리로 대답할 뿐

 

산은 언제나 제 자리에 있는데

구름이 잠시 머물다 가고

바람이 무심결에 스쳐 지나간다

 

산이 여위어 가면

갈까마귀 울음소리로 계절을 헤아리며

천둥 번개 비바람에도 묵상 중이다

 

산은 외로워도 뒤돌아보지 않고

산은 외로워도 산을 부르지 않는다

 

 

                                       * 월간 우리11월호(통권 4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