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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의 시(2)

by 김창집1 2023. 11. 7.

 

 

발가락 군*의 소식을 듣다

 

 

서귀포 몽마르트르 솔동산길 오르다가

그저 비나 피할까 잠시 들른 이중섭 거처

일본서 당신의 부고가 손님처럼 와 있네요

 

수백여 통 남편의 편지,

그 편지 한 장 없어도

붓과 팔레트마저 미술관에 기증하고도

서귀포 피난살이가 그중 행복했다니요

 

돌아누우면 아이들 돌아누우면 당신

게들은 잠지를 잡고 아이들은 게를 잡고

오늘은 별 따러 가요

하늘 사다리 타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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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화가는 아내를 발가락이 길다고 발가락 군이라 불렀다.

 

 

 

 

순록의 태풍

 

 

바다도 바람나고 싶을 때 있나 보다

필리핀으로 일본으로 그리고 제주섬을

한바탕 외눈박이로 휘휘 저어놓는다

 

아무리 연약해도 무리 지으면 버텨낸다

순록도 그 중심에 새끼들 들여놓고

비잉빙 바깥을 돌며 여린 잠을 지켜낸다

 

아가야, 네 눈에는 무엇이 깃들었을까

세상의 어떤 일도 그 안에선 잠잠하다

 

한순간, 그 태풍의 눈에

까꿍 할 뻔 그랬다

 

 

 

 

살금살금 살구나무

 

 

그래도 그리운 건 눈썹 끝에 달린 속세

어느 오름 자락에 세를 든 비구니 절

가끔씩 한눈을 팔듯 가지 뻗는 나무가 있다

 

그중에 살구나무 살금살금 돌담에 기대

어디로 통화할까 그 사람은 누구일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집을 뛰쳐나왔을까

 

해마다 웃자란 생각 가지치기 해봐도

그럴수록 부르고픈 이름이라도 있는 건지

설익은 살구 몇 알을

세상에 툭, 내린다

 

 

 

 

빛 그리고 그림자

 

 

빛 중의 빛은 그림자가 없다더니

 

햇빛이 좋은 날은 사진도 잘 나오지 않더니

 

당신의 흐린 날에는 속내까지 죄다 보여

 

 

 

 

남방큰돌고래, 제돌이

 

 

지금 어느 위성이 이 섬을 돌고 있나

하루는 김녕바다 또 하루는 모슬포바다

온몸이 문장이 되어 숙명처럼 돌고 있나

 

사는 건 그런 거

섬 뱅뱅 도는 일

수애기 곰세기 남방큰돌고래 제돌이

바다로 되돌려주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대를 보내고도, 아예 보내진 못한 건지

오늘은 수금천화목토성, 한 줄로 엮이는 날

한 두릅 문장을 이끌고

어느 행성 돌고 있나

 

 

   * 김영순 시집 밥 먹고 더 울기로 했다(시인동네시인선 215, 2023)에서